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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철희의 한반도평화워치

대북 제재 유지하되 비핵화 진정성 보일 때 완화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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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네 가지 비핵화 접근법의 가능성과 한계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건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건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세계를 뒤덮은 지금 북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에서 물러나 있다. 그렇다고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한 것은 아니다. 한국과 국제사회의 관심이 약해졌을 뿐이다. 지금은 마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외치던 오바마 행정부 말기를 연상시킨다.

대북 화해·협력정책과 전면적 강압정책 모두 북핵 폐기에 실패 #비핵화에 무관심한 현재의 북한에 ‘비둘기파 강압정책’ 써볼만 #강압하되 북이 전향적 태도 보이면 비례적으로 제재·압박 줄이고 #진정한 협상 의지 없다면 국제사회의 제재 유지·강화로 돌아가야

북한이 먼저 문제를 일으키고 북한이 먼저 협상을 제안하지 않는 한 조용히 참고 기다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나중에 ‘비전략적 방치(non-strategic neglect)’의 시기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한·미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치하던 시기에 북한은 더 고도화된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에 다가서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북한을 다룸에 있어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전면적인 관여정책(comprehensive engagement)이 유효한 듯 보이는 시기가 있었다. 북한이 핵물질, 핵무기, 핵 운반수단, 핵탄두 소형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아직 핵보유국 지위에 다가설 정도의 역량을 갖추지 않았다고 판단될 시기에 한국은 화해·협력정책을 폈다. 북한이 체제와 안보 불안이 있기 때문에 한국이 선도적으로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보았다.

북핵은 체제 안전 보장용 아니다

남북 관계가 악화하며 2016년 2월 개성공단에서 철수해 통일대교를 건너는 차들. [중앙포토]

남북 관계가 악화하며 2016년 2월 개성공단에서 철수해 통일대교를 건너는 차들. [중앙포토]

‘비대칭적 상호주의’라는 원칙에 따라 북한에 지원에 상응하는 즉각적 반대급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북한이 비핵화를 실현하는 것은 입구가 아닌 출구에서도 좋다는 아량 있는 여유도 있었다. 비핵화가 가능하다면 북한에 한국의 선의와 지원을 통한 베풀기가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북한은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풀지 않았고 국제사회에 냉기가 돈다는 이유를 들어 비핵화 약속을 걷어찼다. 전문가들조차 북한의 핵 개발 이유가 단순히 체제 안전보장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만약 북한이 핵 개발을 고집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줄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핵을 개발하고도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핵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국제사회는 강한 제재와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면적 유화정책을 버리고 전면적 강압정책(comprehensive coercion)을 채택했다. 북한의 주요 수출 품목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대북 지원을 틀어막고, 북한의 외화 수입원을 차단하는 조치들이 뒤를 이었다. ‘화염과 분노’라는 트럼프식 최대 압박과 함께 전개된 국제 제재는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는 데까지는 성공적이었다.

중국도 동참한 대북 제재를 경제가 취약한 북한이 견뎌내기란 용이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면적 강압정책은 북한을 협상의 물가까지 끌고 오기는 했으나 비핵화라는 물을 마시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북한은 마치 비핵화를 실현할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대북 적대시 정책의 포기와 체제 안전 보장이라는 조건을 걸었다. 북한의 약속이 ‘조건부’였다는 걸 깨닫기까지 의외로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강압정책은 북한을 어렵고 힘들게 만들 수는 있어도, 자신들의 시각에서 보면 ‘천하의 보도’인 핵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목을 죄는 것은 아니었다. 제재가 지속하면 북한 체제가 균형을 잃고 흔들리리라는 것은 희망적 사고일 뿐 현실이 되지 못했다. 중국도 북한이 미국의 요구대로 흘러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이 껄끄러우면서도 자기들에게 더욱 의존하도록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북한은 ‘정면대결’과 ‘자력갱생’을 내세우며 협상의 문턱에서 멀어져갔다.

비핵화엔 상호주의와 비례성이 필수

아직 제대로 써보지 않은 정책은 조건부 관여정책(conditional engagement)과 유연한 강압정책(flexible coercion)이다. 전자는 북한이 비핵화의 행동에 나설 때 비례적으로 관여하는 ‘행동 대 행동’의 시도다. 이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테스트하는 데 중요하다. 이는 철저한 상호주의에 기반을 두고 북한의 행동에 비례하는 지원과 협력을 펼치는 것이다.

모든 행동은 ‘검증 가능한(verifiable)’ 것이어야 한다. 북한의 의도가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제재로 돌아갈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매파 관여정책(hawkish engagement)에 가깝다. 2018년 북한과의 협상 초기에 이 정책을 써봤으면 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낭만적 기대와 근거 없는 신뢰가 이 접근법의 현실화를 막아섰다.

후자는 강압을 기초로 하되 북한이 전향적 태도를 보일 때 행동에 비례하여 유연하게 제재와 압박을 줄여가는 방법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향한 진정성을 보인다면 이에 상응하게 뒤로 조금씩 물러서는 방식이다. 여기에도 상호주의와 비례성·가역성은 필수적이다. 북한이 협상할 의지가 없다면 국제사회 제재를 유지하거나 강화하면 된다. 이는 말하자면 비둘기파 강압정책(dovish coercion)에 가깝다.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무관심한 현 단계에 적용해볼 만한 정책이다.

무조건적 동조도, 전략적 인내도 위험하다

북한을 다룰 때 가장 위험한 접근법은 무조건적 동조와 전략적 인내다. 무조건적 동조는 북한의 핵 의도를 지나치게 평가절하한다. 북한이 주장하듯 핵 개발 이유를 외부 위협 때문이라는 데 동조하고, 한국 정부가 북한과 입을 맞추어 북한에 대한 외부 위협 제거에 함께 나서는 ‘우리 민족끼리’ 노선을 취한다.

북한이 한국에 대해 공격적이며, 우세한 군사 능력을 갖추고자 하는 의도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천진난만하다. 또 한국이 북한에 잘해주면 북한도 호응할 것이라고 믿고 맡긴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북한과 호흡을 맞춰 외부 위협 제거와 제재 완화의 공동 전선을 펼 경우, 미국·일본에만 저항하는 양상이 돼 비대칭적이다.

북한은 여전히 우리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점을 무시한 설익은 무장 해제다. 중국은 안보 면에서 결코 미국의 대체재가 될 수 없다. 북한의 동맹 체제는 그냥 둔 채 한국의 안보 안전망(security safety net)인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를 손상하거나 약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균형적이다. 조건을 달지 않은 북한 감싸기는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전략적 인내는 정책적 대안이 될 수 없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북한이 스스로 무너지거나, 궁지에 빠진 북한이 어쩔 수 없이 협상의 테이블로 다시 나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에 근거한 방침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일정 기간 스스로 선택에 의해 도발과 실험을 자제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과 동맹국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는 상태에서 우리만 인내하는 것은 전략 부재를 넘어서서 대책 상실에 가깝다.

언제까지 인내해야 할지 모른다면 더 불안하다. 만약 인내의 한계점이 북한의 전면적 핵 능력 완성 선언 지점까지 갔을 때는 뒤늦게 후회해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불과하다. 북한이 흔들릴 날을 기도하며 인내하는 것은 더욱 비현실적이다. 고난의 행군은 있을지언정 붕괴를 기대하기엔 체제의 내구성이 아직 강하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