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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미안해, 5년 전과 똑같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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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논설위원

김승현 논설위원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처럼 종이 날이 만져졌다. 아내는 아침 일찍 동네 약국에서 받은 마스크 구매용 번호표를 쥐고 있었다. 야근으로 늦잠 잔 게 미안했지만, 오히려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에이, 아직 마스크 남아 있잖아….”

아내는 마스크 구하러 동분서주 #말뿐인 가장은 계획·디테일 없어 #무책임한 ‘코로남불’ 사과합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아내. 핀잔은 한 귀로 흘렸다. 아무 생각 없이 입만 나불댄 게 하루 이틀인가. ‘마스크 대란’ 상황에도 매일 새 마스크 쓰는 게 누구 덕인데…. 님의 침묵 앞에 어느새 자아비판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한 달 보름쯤 전부터 바지런히 움직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아직 우한 폐렴으로 불리고 있을 때다. 중국 확진자는 100명을 넘지 않았고, 춘절에 확산이 우려된다는 경고가 이어졌다. 노스트라다무스가 빙의한 듯 “중국인을 막아야 한다”던 아내는 뜻대로 안 되자 마스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한국도 곧 우한처럼 된다”면서다. 모바일로 처음 주문한 마스크 20개(KF94)의 가격은 1만원이 조금 넘었다. 개당 500원 정도다. 이후 밤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주문서를 입력했다. 아침이면 마스크와 손 세정제, 일회용 비닐장갑, 알코올 솜이 문 앞에 배달됐다. 아내 지시로 양가 부모님 댁에도 마스크를 박스째 갖다 드렸다.

데자뷔처럼 5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메르스가 한국을 휩쓴 그때도 아내는 평균 이상의 경계심을 보였다. 그게 못마땅했다. 지인 상가에도 못 가게 해서 싸웠고, 야근이라고 거짓말하며 문상을 했다. 국내 최고 병원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목격하고서야 아내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경계의 수위를 높이는 게 옳다는 취지로, 메르스 상황에 허둥대는 박근혜 정부를 질타하는 칼럼도 썼다. ‘공포심에도 개성이 있다’는 제목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메르스 피해 상황을 투명하게  알리지 않으면서 정작 위험에 노출된 국민에게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율배반을 향해 “겁 많은 국민은 바보인 줄 아느냐”고 꾸짖었다.

문득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코로나19 앞에 떨고 있는 그를 다시 ‘겁 많은 국민’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손 씻을 때 ‘퐁당~퐁당~돌을~던지자~’를 완창(30초 동안 손 씻기)하는 건 오버라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을 알코올 솜으로 닦는 일도, 지하철에서 일회용 장갑을 끼는 것도 부끄러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볼펜으로 누르라는데도 매일 깜빡하고 있다. "적당히 해라”라고 반항도 했다. 본전도 못 건졌지만, "조심성으로는 보건복지부 장관님”이라 비꼬았다.

눈앞에 위기가 창궐하기 전까지 왜 심각성을 먼저 인식하지 못했을까. 왜 내 가족의 걱정을 남의 불안처럼 여겼을까. 메르스엔 ‘메르남불(남의 불안)’, 코로나19엔 ‘코로남불’이었을까. 과거 아내가 일깨워 준 경계심은 메르스 종식이란 말을 듣자마자 곧장 사라졌던 것 같다. 5년이 지나 다시 잘못을 인지하기까지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가 추가 주문한 각종 안전 상품의 배달이 취소되고 있었다. 인터넷에선 마스크 업자들의 바가지 상술, 가짜 알코올 솜 사기 등 코미디 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코로나19 확진자는 6000명을, 사망자는 40명을 넘었다. 대통령은 "마스크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 송구스럽다”고 했다. 수십 개의 마스크를 가진 게 이토록 든든한 일이 될 줄이야.

가족 셋이 매일 쓰다 보니 많아 보였던 마스크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아내는 "당신 잔소리 때문에 더 사지 못했다”고 원망했다. 아침에 약국을 찾은 것도 그래서였다. 번호표를 반납하고 마스크 2개를 3000원에 샀다고 했다. 아내는 이제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관습법상) 가장은 또 한발 늦었다. 마스크 재고도, 하루 사용량도 따져보지 않았다. 이솝우화 속 개미와 베짱이가 따로 없었다.

가족 안전을 확보하는 매뉴얼은 누가 만들어야 하나. 남편과 아내, 아빠와 엄마의 역할이 따로 없지만, 나 몰라라 한 가장의 직무유기는 ‘빼박’ 유죄다. 생각 없이 말만 앞세우고 마스크 개수 따위엔 신경도 안 썼다. 다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무능일 뿐이다. 그것도 5년 전 전철을 되밟았으니 가중처벌감이다. 리스크 관리에 계획이 없었음을, 안전 보장을 위한 단 하나의 디테일도 챙기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사과한다.

아내가 마스크를 사두지 않았다면, 30초 손 씻기를 채근하지 않았다면, 일회용 마스크를 3일 이상 쓸 수 있게 열심히 말리고 있거나 어딘가 한적한 곳에 격리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닥쳐올 수 있는 예측불허의 위험 앞에서 5년 전과 똑같았던 가장의 ‘코로남불’이 아내와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김승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