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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초등교 옆 코로나 격리소 취소···경산시 "소통" 주민은 "통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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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4시 경북 경산시 경북학숙. 건물 정문이 인근 주민들이 설치한 텐트와 현수막 등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당초 이곳은 이날 오후 경북 지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경증 환자들을 실은 구급차가 통과할 예정이었다. 주민들이 내건 현수막에는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세요", "코로나 생활치료센터 지정 반대" 등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4일 경북 경산시 경북학숙 인근 주민들이 코로나 19 생활치료센터 지정에 반대하며 경북학숙 출입문을 막고 있다. 진창일 기자

4일 경북 경산시 경북학숙 인근 주민들이 코로나 19 생활치료센터 지정에 반대하며 경북학숙 출입문을 막고 있다. 진창일 기자

경북학숙의 생활치료센터는 폭증하는 코로나19 환자들을 감당 못 한 정부와 지자체가 “경증환자만이라도 격리하겠다”며 내놓은 고육지책이었다. 정부와 지자체는 “생활치료센터가 운영되면 지역사회의 코로나19 확산 우려도 사그라들 것”이라는 전망도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주거지와 학교 바로 옆에 코로나19 환자 격리 시설이 들어온다는 점을 들어 강력히 반발했다. 배선영(40·여) 봉황초등학교 학부모 회장은 “우리들의 행동을 ‘님비’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며 “개인적으론 환자들에게 송구하고 저 또한 환자가 될 수 있다 생각하지만, 학교와 주거지 옆 격리시설은 안 된다”고 했다.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최영조 경산시장과 부시장은 잇따라 농성장을 찾았다.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무위에 그쳤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의 이야기는 ‘설득’과는 거리가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주민은 “최영조 시장이 농성장에 왔을 때 우리를 설득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문을 막고 진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 시장에게 ‘여기는 주거지 인근인데, 이곳에 코로나19 환자를 격리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경산에서는 여기밖에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다”며 “와서 하는 말이라고는 ‘무조건 이곳에서 격리 치료해야 한다’는 말뿐이니 주민들이 화가 난 것”이라고 했다.

4일 경북 경산시 경북 학숙 인근 주민들이 생활치료센터 지정에 반대하며 경북 학숙 출입문을 막고 있다. 진창일 기자

4일 경북 경산시 경북 학숙 인근 주민들이 생활치료센터 지정에 반대하며 경북 학숙 출입문을 막고 있다. 진창일 기자

주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배선영 봉황초 학부모 회장은 “경산시 관계자가 경북학숙을 드나들 때 혹시 이곳이 격리 시설로 지정되냐 물었더니 절대 안 들어온다고 했었다”며 “그런데 뉴스를 보고 나서야 이미 격리 시설로 지정된 것을 알았다”고 했다.

경북도와 경산시가 “설득”이라고 주장한 것이 주민들에게는 통보였고 소통의 부재였던 것이다. 코로나19 격리시설은 여전히 부족하다. 심지어 경북학숙은 경북 내 30곳(767실) 생활치료센터 중에서도 151실로 가장 수용 가능 인원이 많은 곳이다.

하지만 경산시는 주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생활치료센터 지정을 취소하기로 했다. 지난 3일 경북학숙이 코로나19 경증환자를 격리 치료하기 위한 생활치료센터로 결정한 지 하루 만이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난 1월 30일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인근 마을에 모습을 보이자 주민들이 계란을 던지며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난 1월 30일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 인근 마을에 모습을 보이자 주민들이 계란을 던지며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격리시설을 놓고 정부와 지자체, 주민이 갈등을 빚었던 전례가 있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과 양승조 충남지사, 오세현 아산시장과 충남 아산이다.

이곳에서는 중국 우한에서 송환된 교민을 수용하는 문제를 놓고 진 장관과 양 도지사, 오 시장이 주민들에게 계란 세례를 맞았다. 하지만 양 지사는 주민들의 거센 항의에도 “마을에 임시 집무실을 내겠다”고 했다. 진 장관은 약 1시간 동안 주민들과 대화를 나눈 결과 '해피엔딩'으로 일이 마무리됐다. 수장들의 행보가 주민들과의 갈등을 푸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경북학숙 인근 주민들은 자신들의 님비를 인정하면서도 내심 정부 부처나 지자체의 책임 있는 대처를 바랐었다. 그래서 최영조 경산시장에게 "우리 아이들이 코로나19에 걸리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만 "무조건 책임지겠다"는 말만 돌아와 더 화가 났다고 한다.

어쨌든 불안해하는 주민들을 만난 사람은 최영조 경산시장과 부시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권한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정부나 광역자치단체의 미흡한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4일 경북 경산을 방문하고도 경산역만 들러 방역하는 모습만 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지사가 이날 브리핑에서 경북학숙 문제를 언급했던 만큼 현장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찾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보건당국과 경북도가 생활치료센터에 대한 '지정 취소'라는 카드를 매만지기 전에 주민들과 진짜 소통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경산=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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