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월의 금리 빅컷, 오히려 월가에 ‘비상벨’ 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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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3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식 거래인이 생각에 잠겨 있다(왼쪽). 코스피가 급등한 4일 서울 하나은행 딜링룸 모습. [신화=연합뉴스, 뉴시스]

3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식 거래인이 생각에 잠겨 있다(왼쪽). 코스피가 급등한 4일 서울 하나은행 딜링룸 모습. [신화=연합뉴스, 뉴시스]

“경제가 요동칠 수 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의 경고다.

중앙은행 금리 인하 경쟁 시작 #0.5%P 인하에도 뉴욕증시 급락 #WP “투자자 불안감만 키웠다” #크루그먼 ‘실탄 부족해졌다’ 경고 #한국은 반색, 주가 오르고 환율 뚝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3일 기준금리를 전격 인하했다. Fed는 이날 긴급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소집해 연방기금 금리를 이전보다 0.5%포인트 낮은 연 1.0~1.25%로 조정했다. 통상적인 인하 폭(0.25%포인트)의 배인 ‘빅컷’ 금리 인하다. 오는 17~18일 정례 FOMC를 2주 앞두고 열린 컨퍼런스콜에서였다. Fed가 긴급회의에서 금리를 내린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2년 만이다.

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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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중앙은행이 금리 인하로 시중에 돈줄을 풀어주기로 결정하면 주가에는 호재가 된다. 하지만 이날 뉴욕 증시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다우지수는 전날보다 785.91포인트(2.94%) 떨어진 2만5917.41로 거래를 마쳤다. 나스닥지수도 268.07포인트(2.99%) 급락한 8684.09로 마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금리를 내리면 소비심리를 자극하고 대출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긴 한다”며 “그러나 (금리 인하는) 감염병 확산을 막거나 기업들이 주문 연기와 인력 문제에 대처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Fed의 전격 금리 인하가 오히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시장 불안을 키웠다는 시각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경제 상황이 예상보다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는 ‘비상벨’을 울린 셈이라고 하는 투자자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 신문은 “제롬 파월 Fed 의장이 기자회견에서 추가 금리 인하를 강하게 시사하지 않은 것은 ‘실수’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크루그먼 교수는 앞으로 경제상황이 더 악화할 경우 Fed의 ‘실탄’이 부족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Fed가 금리를 내리기 전 기준금리는 연 1.5% 정도였다”며 “Fed가 금리를 더 내릴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에 놀란 중앙은행기준금리 인하 경쟁.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코로나19에 놀란 중앙은행기준금리 인하 경쟁.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4일 한국 증시는 미국의 금리 인하 소식에 반색하며 큰 폭으로 올랐다. 달러값 급락, 원화값 급등이 대형 호재가 됐다. 통상 글로벌 투자자들은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한국 등 신흥국 증시의 투자 비중을 늘리는 경향이 있다. 코스피 지수는 전날보다 45.18포인트(2.24%) 오른 2059.33에 거래를 마쳤다. 외국인 투자자는 1500억원 넘는 주식을 사들였다. 외국인이 코스피 시장에서 순매수를 기록한 것은 지난달 21일 이후 8거래일 만이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값은 전날보다 7.4원 상승(환율은 하락)한 달러당 1187.8원에 거래를 마쳤다. 반면 선진국 시장에 속하는 일본 도쿄 증시의 닛케이지수는 전날보다 0.08% 오르는 데 그쳤다.

채권 시장도 요동쳤다. 시장 금리의 지표로 통하는 국고채 3년물 금리는 크게 하락(채권값 상승)해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이날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전날보다 0.081%포인트 떨어진 연 1.029%로 마감했다. 한국은행 기준금리(연 1.25%)는 물론 역대 최저였던 지난해 8월 19일(연 1.093%)보다 낮은 수치다.

미국에 앞서 호주와 말레이시아 중앙은행도 기준금리를 각각 0.25%포인트 내렸다. 코로나19의 여파가 심각해지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행진은 이어질 전망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올해 들어 금리를 내린 곳은 11개국이다. 중국은 OECD 회원국은 아니지만 지난달 20일 1년 만기 대출우대금리(LPR)를 이전보다 0.1%포인트 내린 연 4.05%로 조정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말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연 1.25%)를 동결했지만 조만간 금리를 내릴 것이란 시장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기준금리가 한국보다 낮아지면서 한은으로선 한·미간 ‘금리 역전’으로 인한 외국인 자금 유출의 부담을 덜었다. 한때 달러당 1220원까지 떨어졌던 원화값이 1180원대로 상승한 것도 한은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넓혀줬다.

일부에선 한은이 다음 달 9일 금통위 정례회의 전에 임시 회의를 열고 금리를 내릴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달 말 금통위 결정을 너무 빨리 뒤집는 것인 데다 한은이 현재 경제상황을 금융위기급으로 인식한다는 해석이 나올 수 있어서다. 한은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왔던 2008년 10월 임시 금통위를 열어 기준금리를 사상 최대 폭인 0.75%포인트 인하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4일 오전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금리 인하보다는 선별적인 미시적 정책수단을 활용해 취약 부문은 집중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기존 입장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 정책금리가 국내 기준금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낮아졌고 향후 통화정책을 운영함에 있어 이와 같은 변화를 적절히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금리 인하의 가능성은 열어둔 것이다.

한은의 고민에는 한국만의 특수한 사정도 있다. 금리를 낮추면 부동산 거품을 부추길 수 있어서다. 집값 상승세를 정부가 총력전을 펴는 상황에서 한은의 금리 인하는 부동산 정책의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다. 이종우 증시 칼럼니스트는 “Fed가 워낙 전격적인 조치를 했기 때문에 한은의 금리 인하에 대한 부담은 줄었다”며 “부동산 시장에 대한 판단에 따라 4월 금리 인하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조현숙·장원석·황의영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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