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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영범의 이코노믹스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비정규직 무더기로 양산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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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비정규직 해법의 경제학

급증하는 비정규직

급증하는 비정규직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적 관심과 여러 대책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통계청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19년 8월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는 748만 명이다. 노사정이 합의한 기준에 따라 통계청이 비정규직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한 2003년 8월 462만 명보다 300만 명 가깝게 늘어났다. 같은 기간 전체 임금 근로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2.6%에서 36.4%로 3.8%포인트 증가했다.

보호 규제 만들수록 비정규직 증가 #근로자 5% 불과한 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처우 비교는 비현실적 #노동 유연성 높여야 고용도 늘어나

근속 기간과 근로시간이 짧고 주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비정규직의 처우는 정규직보다 열악하다. 2019년 8월 기준으로 월평균 임금은 173만원이다. 317만원을 받는 정규직보다 144만 원 적고, 정규직 대비 54.6%에 머문다. 비정규직 인원도 늘어났지만, 정규직 대비 임금도 오히려 낮아졌다.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 가입률은 50% 미만이다.

지난 10여년의 경험에 의하면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 및 처우 개선을 목적으로 시행한 법 제정과 규제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금까지 성과를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국회에서 비정규직 차별을 금지하고 기간제 근로자의 계속 사용 기간과 파견근로자의 파견 기간을 2년으로 제한한 ‘비정규직 3법’이 통과된 것은 2006년 말이었다. 법 시행 2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보면 비정규직은 2007년 3월 580만 명에서 2009년 3월 540만 명으로 약간 줄었으나 2011년을 기점으로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법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오히려 고착화한 측면이 있다. 기간제 근로자 중 일부는 정규직 혹은 새로 생겨난 직군인 무기(無期)계약직으로 전환됐지만, 많은 기간제 근로자는 반복적으로 2년마다 직장을 바꿔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2007년에서 2019년까지 비정규직 근속 기간은 3개월 늘어난 반면에 정규직은 2년 늘어났다. 연공급 위주의 노동시장 구조에서 짧은 근속 기간은 낮은 임금을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비정규직 제로’를 공약을 내세웠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비정규직이 오히려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2017년 8월 658만 명에서 2019년 8월 748만 명으로 90여만 명 늘어났다.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완전 실패

급증한 비정규직 수

급증한 비정규직 수

2019년 8월 조사결과 발표 당시 정부는 비정규직 급증에 대해 구차한 변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실체는 따로 있다.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노동존중 정책으로 해고가 더욱 어려워지면서 사업주가 정규직보다는 필요 인력을 비정규직으로 충원했다는 현실이다. 삼성·LG 등 대기업은 정부 정책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정규직의 급증은 공공부문이 선도해 민간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촉진하겠다는 정책 의도의 실패를 의미한다.

취임 후 3년 안에 20만 명을 정규직화하겠다고 선언한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대책도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2019년 초 전환 대책의 마지막 단계인 민간위탁 부분은 기관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면서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처음부터 무리한 정책이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현 정부는 특정 시점에서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준비 없이 획일화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면서 공공기관의 노사 갈등뿐만 아니라 공공기관 내부에 노노 갈등을 유발했다. 앞으로도 상당한 후유증이 예상된다. 대통령이 취임 직후 방문해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하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의 상징이 된 인천공항공사에서도 협력회사의 많은 직원이 (새로 설립된) 인천공항공사 자회사의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지금도 노사 및 노노 갈등이 진행 중이다. 또 많은 공공기관이 정규직 전환 대상 직원의 선발과 관련해 발생한 불공정 논란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비정규직은 기업이 작을수록 비중이 높다. 300인 이상 대기업에선 5.6%에 불과하지만, 5~299인 규모에선 67.3%에 달한다. 이런 수치는 무엇을 시사할까. 시장의 힘으로 민간부문에 좋은 일자리가 많아질 때 비정규직 문제도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90% 이상이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현실에서 임금을 비롯한 처우 문제를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와 비교해 풀려고 하면 오히려 해결이 어렵게 된다.

정규직 압박할수록 기업 해외로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정규직 3법의 하나인 파견법으로 자주 법적 다툼의 대상이 되는 대기업 사내하청 기업 근로자의 경우, 같은 현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면서 급여가 적은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대기업 1차 협력업체의 근로자보다 급여가 높은 사내하청 근로자가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와 강력한 노조의 힘을 앞세워 경쟁력을 갉아먹을 정도로 과도한 처우를 쟁취한 대기업 정규직과 비교해 같은 대우를 요구하면 어떻게 될까. 대기업은 국내보다는 해외투자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결국 국내의 좋은 일자리는 줄어든다.

비정규직 중 소수에 불과한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협력회사의 정규직에 집중해 비정규직 문제를 이슈화하는 노조의 투쟁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하면 기업의 인력 운용이 더욱 경직되면서 취약계층이 대부분인 비정규직의 좋은 일자리 고용 기회가 축소된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기업이 정규직 채용을 기피하고 비정규직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노동시장 경직성을 완화하는 데서 출발해 한다. 정규직, 특히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고용안정 및 처우가 적정 수준에서 관리될 때 비로소 기업은 비정규직을 활용하려고 하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법 파견 논란으로 높은 사회적 갈등 비용을 유발하는 파견제도도 바꿔야 한다. 파견허용 업종을 대폭 확대하거나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꿔 인력 활용의 유연성을 높여야 중소기업 근로자 및 여성·청년, 중·고령 근로자 등 취약계층의 대기업 고용 기회가 확대될 수 있다. 끝으로 어디서 커리어를 시작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능력과 성과에 기반을 둔 열린 노동시장이 구축돼야 한다.  중소기업에서 역량을 쌓은 비정규직이 대기업 정규직으로 옮겨 갈 수 있을 때 비정규직 문제가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양한 노동 형태 인정해야 비정규직 문제 해결

2002년 7월 노사정 합의에 따른 통계청의 비정규직 실태 조사에 따르면, 2019년 8월 현재 비정규직은 임금근로자의 36.4%다.

노동계는 기존의 비정규직 정의에 관한 노사정 합의가 15년 이상 지나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노동계의 주장을 반영해 고용노동부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18년 말 기준으로 ‘플랫폼’ 기반 근로자 등 새로운 특수고용직 55만 명을 포함하면 특수고용직은 221만 명에 달한다. 통계청 추산의 4배 규모다. 노동계 주장대로 특수고용직을 비정규직으로 보면 비정규직 비중은 40%로 올라간다. 또 노동계는 대기업 현장의 협력업체 정규직도 비정규직으로 봐서 비정규직 비중은 최소 45%라고 주장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임시근로자(temporary worker)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자료를 이 기준에 맞추면 비정규직은 2019년 8월 현재 임금근로자의 24.4%다. 경영계는 OECD 기준을 더 엄격히 적용해 파견·일일 근로자 등 다른 나라들이 포함하지 않은 근로자를 제외한 15%를 비정규직으로 본다.

비정규직 범위를 넓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모색하면 어떻게 될까. 실질적 성과가 없거나 오히려 상황이 악화할 수 있다. 정부는 ‘위험의 외주화’를 근절한다는 취지에서 공기업 발전회사의 자회사를 세워 민간 협력업체의 안전 관련 직원을 발전회사의 자회사 직원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중견기업인 협력업체의 운영지원 인력은 대거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올해 1월부터 플랫폼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일하는 프리랜서 보호법이 시행되면서 계약 해지가 속출하자 프리랜서들까지 법의 시행을 정지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범주에 새로운 특수고용직까지 포함하려는 우리에게 시사점이 크다. 다양한 노동 형태를 인정하는 게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