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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曰] 무관중 경기장에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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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호 30면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서울지하철 2호선 전동차 안. 두꺼운 마스크 속에 표정을 감춘 사람들의 침묵이 힘겹다. 하필 내 자리 앞에 선 두 청년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다. ‘ㅌ’ ‘ㅍ’ 같은 음절이 들어간 말을 할 때는 비말(飛沫)이 튀지 않나 싶어 슬쩍 쳐다보게 된다.

코로나19로 프로농구·배구 입장 통제 #팬의 힘, 일상의 소중함 깨닫는 계기로

종합운동장 역에 내렸다. 프로농구 서울 SK와 부산 kt의 경기가 있는 날. 8번 출구에서 잠실학생체육관으로 가는 짧은 길이 유난히 을씨년스럽다. 김밥과 구운오징어 등 주전부리를 팔던 행상도, 기념품 판매와 이벤트를 진행하던 천막도 자취를 감췄다. 가로등이 꺼져 컴컴한 체육관 앞에서 멈칫했다. 혹시 경기 자체가 취소된 건 아닐까. 나는 코로나19로 인해 무관중 경기가 진행 중인 프로농구장을 취재하러 가는 중이다.

다행히 한쪽 출입구에 불이 켜져 있다. 체온을 재고 신분을 확인한 뒤 입장했다.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지만 코트 주변으로는 관계자 150여 명이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통신사 라이벌전인데도 경기는 시작 전부터 맥이 빠졌다. kt의 외국인 선수 두 명이 “도저히 한국에서 경기를 할 수 없다”며 팀을 나가버린 것이다. 반면 SK에는 한국에서 13년째 뛰며 메르스 사태, 북핵 사태 등을 경험한 애런 헤인즈(38)가 있었다. 그가 “괜찮다”며 동료 자밀 워니를 설득한 덕에 SK는 두 선수를 모두 지킬 수 있었다. 전력의 70% 이상이라는 외국인 선수 없이 kt가 이기긴 어려웠다. 요즘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허재 아들’ 허훈을 중심으로 kt는 버텼지만 그것도 전반까지였다.

장내 아나운서가 있고 응원용 음악도 여전히 꽝꽝 울렸다. 그러나 흥을 돋워주던 응원단장, 치어리더는 없었다. 팬들의 함성도, 흥겨운 댄스 타임도, 민망한 키스 타임도 없었다. 치어리더가 관중석을 향해 대형 새총이나 발사기로 선물을 쏘아주던 장면도 언제였던가 싶었다. 대신 벤치 선수들의 응원과 감독의 지시, 심판의 설명은 또렷하게 들렸다.

경기 종료 3분을 남기고 kt 양홍석이 볼 다툼 도중 쓰러졌다. 선수의 고통스런 비명이 경기장에 생생히 울렸다. 95-74로 SK 승리.

경기 후 인터뷰에서 kt 서동철 감독과 SK 문경은 감독은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말을 했다. “관중이 없으니 흥이 나지 않았다. 팬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절감했다.” 마스크를 끼고 인터뷰장에 들어온 헤인즈는 “팬이 없는 스포츠 경기는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관중 경기를 하는 것보다는 일정 기간 리그를 중단하는 게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프로 스포츠의 뿌리는 팬이다. 선수는 팬의 관심과 응원에 힘입어 기량을 키우고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미디어가 중계하는 현장에 스폰서가 돈을 투자한다. 수억원의 연봉을 받는 스타들이 뛰는 프로농구도 팬과 스폰서가 없다면 ‘3m5cm 높이 바구니에 공 많이 집어넣기 시합’일 뿐이다. 이 명백한 사실을 선수와 지도자, 구단과 프로농구연맹(KBL)이 아프게 느끼고 있다. 심판도, 관련업계 종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팬도 그렇다. 프로 스포츠라는 상품(선수·구단·리그)이 없으면 요즘 같은 잿빛 일상이 얼마나 더 힘들까. 경기가 있고 리그가 진행되니까 기대도, 흥분도, 욕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든 장본인에 대한 책임은 단호히 물어야 한다. 동시에 이 횡액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도 확실히 느껴봤으면 좋겠다. 무심한 듯 내 곁을 지키는 사람들, 먹고 일하며 나다닐 수 있는 자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경기를 찾아 선수와 팀을 응원하는 것까지…. 스포츠는 ‘일상성(ritual)의 회복’을 뜻한다. 요즘 말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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