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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비밀스런 졸업식의 전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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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지난 수요일은 원래 졸업식이 예정되었다가 취소된 바로 그 날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굳게 잠겨있는 마음과 달리 하늘은 의외로 쾌청하고 구름은 자유로웠다. 캠퍼스에는 삼삼오오 졸업 가운을 입은 젊은이들이 질병관리본부의 안전수칙에는 아랑곳없이 활짝 웃는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국인이 일상에서 처음 겪는 #불안과 거리둠, 공포의 지옥 #영위하던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발견하는 기회로

놀라운 광경은 겨울의 누런 잔디광장 위에도 펼쳐지고 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잔디밭을 걸으며 깔깔거리고, 학사모를 하늘로 던져올리며, 서로를 축하하는 풍경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간다. 마스크를 쓴 친구들도 물론 간간이 보이지만, 개방된 야외여서 그런지 사진을 찍는다고 그런지 혹은 젊음의 자신감인지, 맨 얼굴들이 더 많았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웃음과 그 뒤에 드러낸 흰 이가 너무나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리고 악수조차 꺼리는 세상에서 저 잔디밭만큼의 땅에서는 바이러스가 잠시 사라진 듯 하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매년 있는 일상적인 졸업식 날의 흔한 풍경이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졸업식을 잃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그 풍경을 한마디로 묘사할 방법이 없어 그만 말을 잃고 만다. 그것은 무모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찬란하고,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조금은 슬픈 풍경이다. 졸업식을 잃어버린 졸업생들은 그렇게 조용히, 무언가를 서로에게 읊조리며, 가만히 잔디를 디디며, 교정과 친구들과 자신들의 모습과 아마도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을 자신들의 전화기에 하나씩 새기는 의식(儀式)을 거행하고 있었다. 이것을 나는 졸업식이라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졸업식’들은 수많은 캠퍼스에서, 수많은 초·중·고등학교 교정의 뒤안길에서, 삼삼오오 비밀스럽게 거행되었음을 확신한다.

지금 세상은 새로운 지옥도(地獄圖)를 그리고 있다. 마귀과 화염이 꼭 있어야 지옥이 아니라 곁에 앉은 동료의 숨결이 닿을까 몸을 피해야 하는 곳이 바로 생지옥이기 때문이다. 낯선 이와의 악수가, 오랜 벗과의 식사가 두렵고, 사람과 사람의 대화가 그토록 많은 비말(飛沫)을 생산한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는 마음의 지옥을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각자 홑겹의 마스크에 존재를 의탁하고 타인의 눈길을 피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옥같은 이 공포의 시간을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가 잠시라도 살아야 하는데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부의 무능이거나 밀교(密敎)의 원죄이거나 혐오스런 외국인, 혹은 외지인의 유입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조차 없다면 이 분노를 도저히 삭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포의 지옥 다음 나락은 분노의 지옥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은 지옥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간다. 바이러스와 싸우는데 이성과 힘을 모아야 할 이 시각에 지옥의 기원을 따져 묻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은 부질없는 일이거나, 적어도 공동체로서 우리가 여기를 당장 빠져나가기 위해 잠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어느 방송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즉 그 분노와 공포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토론이 낭자하다.

그러나 정작 비밀스런 졸업식을 거행하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적어도 이 순간만은 두려움도 노여움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약간의 상기된 흥분이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이 철이 없어서도 무모해서도 혹은 주변의 잠재적 바이러스를 잊어서도 아니고, 잠시나마 대학에서의 마지막 일상을 수행할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학교를 벗어나면 이들 앞에 놓여있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서, 이제는 비로소 어른으로서 수행해야 할 무겁고 견고한 일상들이 벽돌짐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그 벽돌짐을 기꺼이 질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울 따름이다.

이들은 어쩌면 그런 일상들이 매우 어렵고 힘들면서도 소중하다는 것을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 알게 되지 않았을까. 출근하기 싫은 몸을 일으켜 지하철에서 부대끼고 온종일 일한 뒤 피곤한 회식을 거듭하는 일상이란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고단하고 버티기 힘들망정 공포와 분노로 점철된 오늘의 지옥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졸업생들은 졸업식을 하고 입학생들은 입학식을 하며,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고 직장인들은 회사를 다니는 그런 지루하고 사소한 일상을 우리는 언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 것은, 바이러스 이후의 삶에도 일상은 항상 남아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오늘도 자신의 일상을 어렵게 지키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 무리의 학생들은 낯익은 얼굴들이다. 이들이 내미는 손을 어찌 잡지 않을 것인가. 이들과 어찌 석별의 농담을 섞지 않을 것인가. 이들의 어깨를 어찌 두드려주지 않을 것인가. 이들을 어찌 축하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학생들을 보내며 물끄러미 바닥을 바라보니 어느덧 잔디밭 광장이 약간은 초록색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