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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고려인삼이 최초의 음식 한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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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호 20면

인삼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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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의 세계사
설혜심 지음
휴머니스트

“한국의 뿌리…은과 맞먹는 가치” #1617년 동인도회사 주재원 극찬 #유럽 과학계 연구대상 각광 #종주국 위상 찾는 노력 있어야

고려인삼이 조선 시대 중국과 일본에 수출한 대표적 무역 상품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졌다. 생산은 조선이, 다량 소비는 중국이 하는 인삼 국제교역 공식은 당시에 확립됐다. 중국 관동삼(關東蔘), 일본 죽절인삼(竹節人蔘)은 효능·맛·향기 어느 하나 고려인삼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19세기 철도 부설을 위해 미주로 이주한 중국 노동자들은 로키산맥 산삼과 미국 중서부에서 재배한 화기삼(華旗蔘)을 복용하며 원기를 찾았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이런 인삼이 동아시아를 넘어 17세기 이후 동서양 교역 네트워크에서 매우 중요한 상품이었다고 설명한다. 동인도회사의 보고서, 관세율 차트, 의약품(생약 포함) 기준을 확립한 약전(藥典), 약재의 형태·효능을 집결한 본초학서, 미국인삼재배자협회 회의록까지 1차 사료를 섭렵한 결과다.

인삼과 서양의 만남은 극적이다. 1617년 일본 히라도(平戶)의 영국 동인도회사 주재원 리처드 콕스가 런던 본사에 통신문과 함께 보낸 인삼이 유럽 상륙 첫 기록이다. 통신문은 “한국에서 온 좋은 뿌리는…은과 맞먹는 가치”라는 내용을 담았다. 1611년 동인도회사 문서철에는 네덜란드 상인 피터 플로리스에게 닌진(인삼(人蔘)의 일본어 발음)을 찾아오라고 지시한 기록도 있다.

인삼은 유럽에서 숱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7세기 영국 철학자·정치사상가 존 로크는 ‘인삼이 아시아에서 열병과 성병 치료제이자 강장 기능을 한다’는 글을 남겼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중국에서 20년을 살다 온 예수회 신부 그리말디에게  1687년 보낸 편지에서 “인삼 뿌리가 그렇게 큰 칭찬을 받을 만큼 효능이 좋은가”라고 물었다.

각국 사신들의 조공 장면을 그린 18세기 ‘만국조래도’. 코끼리 뒤편 조선 사신도 있다. 고려인삼을 바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휴머니스트]

각국 사신들의 조공 장면을 그린 18세기 ‘만국조래도’. 코끼리 뒤편 조선 사신도 있다. 고려인삼을 바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휴머니스트]

관심은 연구로 이어졌다. 영국 왕립학회는 1665년 기관지 ‘철학회보’ 창간호에 인삼 관련 논문을 실었다. 당시 유럽에 확산한 식물원에서 인삼은 주요 수집 대상이었다. 1686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태양왕’ 루이 14세를 알현한 시암(태국) 외교사절은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잔캄’이라는 인삼을 진상했다.

프랑스 왕립과학원은 1690년대 인삼을 본격적으로 연구했으며, 1736년 프랑스 파리의과대학은 ‘인삼, 병자들에게 강장제 역할을 하는가’라는 논문을 쓴 드 생바스에게 인삼 관련 세계 1호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식물 분류의 기틀을 다진 스웨덴의 린네는 네덜란드의 레이덴 대학에 유학하면서 전 세계에서 수집한 인삼을 관찰했으며, 인삼에 파낙스진셍(Panax Ginseng)이라는 학명을 붙였다. 인삼은 유럽 자연과학계 주류의 연구대상이 됐다.

관심과 성과는 임상의학과 무역으로 이어졌다. 유럽 사회에서 인삼은 무기력증·체력저하·마비·어지럼증·심신쇠약·신경장애·히스테리 등 다양한 증상에 활용됐다. 무역도 활발해져 1784년 미국은 독립 뒤 자국 상선을 이용한 첫 해외무역에서 중국으로 가죽·모피와 함께 북미산 인삼을 가져가 ‘완판’했다.

그토록 중요한 인삼이 언제, 왜 교역과 의약품 품목에서 사라진 것일까? 지은이는 그 원인으로 영국의 수입 인삼값 폭등, 미국에 빼앗긴 인삼 무역 주도권, 그리고 과학·의학 연구방식의 전환에서 찾는다. 18세기 중반 들어 서구에서 외래 생약인 인삼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약전에서 빼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당시 서구는 천연재료에서 유효성분을 추출하고 이를 의약품으로 만드는 화학약품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엔 인삼 유효성분을 추출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삼 유효성분인 진세노사이드류 등은 20세기 들어서야 추출, 확인됐다.

인삼 연구는 20세기 들어서야 다시 활발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소련은 한반도에서 인삼을 들여와 재배하면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군인과 쥐를 사용한 스트레스 실험에서 인삼 복용군이 달리기 속도, 집중력, 지구력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도 인삼 가치에 주목했다. 경성제대·조선총독부·미쓰이물산이 연구를 이끌었다. 1939년 개성에 경성제대 직할 생약연구소를 세우고 인삼정·인삼차·인삼비누를 개발했다. 33년 독일 베를린의대에선 조선인 손인수가 ‘진짜 인삼 뿌리에 대하여: 파낙스 진생, 송삼’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개성산 백삼을 이용한 동물 실험으로 효력을 증명했다.

지은이는 이런 역사를 가진 인삼이 최근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지만 정작 고려인삼은 중국의 물량 공세에 밀려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인삼을 자연과학적으로만 연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인문학·경영학·경제학 등 다각적으로 접근해 인삼 종주국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울림을 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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