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훈범 칼럼니스트의 눈

외유 의원 욕하기 전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청년정치

“어휴, 마치 이종격투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차윤주

차윤주

차윤주(37)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자신이 살던 마포구 구의원에 출마했던 윤주씨다. 2등과 불과 303표 차로 떨어졌기에 재도전해볼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선거운동이 너무 힘들었던 까닭이다. 정당 공천 없이 무소속으로 나섰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공천만 받으면 선거운동도 거의 필요 없을 만큼 훨씬 유리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일찌감치 예비후보 등록을 한 그에게 유력정당이 시의원 후보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절하고 무소속을 고집했다. 기존 정당이 기초의회 의원까지 당락을 좌우하는 정치 현실을 바꿔보자는 게 출마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기초의원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구 국회의원이, 지역에 필요한 일꾼보다는 자기 선거에 도움이 될 만한 네트워크 보유자를 공천하는 정치 현실이 지역주민과 밀착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고 있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다.

선거운동 중 침 세례 받기도 #정치에 새 피 수혈 필요 방증 #청년 의원 많은 관악구의회 #욕 먹던 해외연수부터 달라져

유권자들의 무관심과 정치 혐오, 그리고 젊은 후보 특히 여성 후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것도 힘든 과제였다. 아파트 동대표를 하면서 친해진 경비 아저씨한테 출마한다고 했더니 눈빛이 달라지더란다. “그런 나쁜 짓을 왜 하려 하느냐”며 말리시더라는 것이다. 거리 유세를 할 때는 “또래 남성이 다짜고짜 욕을 하면서 얼굴에 침을 뱉고 달아나는 봉변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를 좌절시킨 이러한 혐오와 편견들은 제2, 제3의 차윤주가 계속 나와 기초의회에 입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기초의회는 우리가 일상에서 피부로 직접 느끼는 정책을 결정하는 의회다. 그런데도 상당수 기초의회들이 시민들 위해 일할 사람보다는, 거들먹거리기 위한 자리가 필요한 지역 유지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로 채워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민심과 동떨어진 의사결정이 나오기 일쑤였지만, 유권자들의 무관심 속에서 슬며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기초의회는 주기적으로 의원들이 해외시찰을 다녀올 때나 언론의 조명을 받는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사태에도 불구, 곳곳의 지방의회에서 각종 ‘외유성’ 해외시찰을 강행해 눈총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동안 비난이 들끓다가도 곧 예의 무관심으로 돌아간다. 그걸 아는 선량들이 잠시 몸을 낮췄다가 다시 연수(외유) 기획안을 슬며시 꺼내 드는 악순환이 그래서 거듭되는 것이다.

한 눈으로 봐도 차이가 느껴지는 서울 관악구의회의 해외연수 보고서 목차. 청년의원들이 빠졌던 중국 연수 보고서①는 일차적인 내용으로 허술한 반면 이들이 참가한 유럽연수 보고서②는 현지에서 습득한 알찬 정보들이 담겨있다. ③ 유럽 출장 중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유튜브로 알리고 있는 관악구 청년의원들. 왼쪽부터 주무열·이기중·이경환 의원. [유튜브 캡처]

한 눈으로 봐도 차이가 느껴지는 서울 관악구의회의 해외연수 보고서 목차. 청년의원들이 빠졌던 중국 연수 보고서①는 일차적인 내용으로 허술한 반면 이들이 참가한 유럽연수 보고서②는 현지에서 습득한 알찬 정보들이 담겨있다. ③ 유럽 출장 중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유튜브로 알리고 있는 관악구 청년의원들. 왼쪽부터 주무열·이기중·이경환 의원. [유튜브 캡처]

구의원 되기 프로젝트는 접었지만, 윤주씨는 자신의 도전이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청년 도전자가 있으면 자신이 경험한 선거 노하우를 전수해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위해 한 가지 재미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청년이 기초의회에 대거 진출하면 무엇이 어떻게 바뀔까’라는 제목의 논문이 그것이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20~30대의 청년의원 4명이 동시에 입성에 성공한 서울 관악구 의회의 사례 연구다. 이들은 당시 관악구의회 의원 22명 중 18%를 차지했다. 서울시 기초의원 423명 중 20~30대 비율 8.7%에 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말이 나온 김에 해외연수부터 살펴보자. 2018년 7월 출범한 8대 관악구의회는 지난해 10월까지 모두 6회의 해외시찰을 다녀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청년의원들이 참가한 연수와 그렇지 않은 연수 사이에 차이가 크더란 것이다.

청년의원들이 참가하지 않은 8대 관악구의회의 첫 해외시찰인 중국 방문의 연수보고서는 37쪽이었다. 그러던 것이 청년의원 3명이 합류한 지난해 6월 독일 덴마크 스웨덴 연수 때는 175쪽으로 크게 늘었다. 5박6일(중국)과7박9일(유럽) 일정 차를 감안하더라도 커다란 변화다.

양적으로만 다른 게 아니다. 질적으로는 더 큰 차이가 난다. 중국 연수 보고서는 내용의 대부분이 일차적 정보로 채워졌다. 방문한 도시인 지린 성 연길시의 일반 현황과 유명 관광지인 두만강, 윤동주 생가, 백두산 등의 안내 정보에 불과하다. 굳이 연수를 가지 않아도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것을 ‘자매 도시와의 우호 증진과 협력 노력’이라는 두루뭉술한 수사로 포장했다. 외유성 공무원 해외연수 보고서의 전형이었다.

반면 유럽 연수 보고서에는 꼼꼼한 연수 내용이 담겼다. 방문국 관계자와의 질의응답, 참가자 의견, 연수 사진처럼 참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를 다수 넣었다. 이를 바탕으로 4개 분야에 걸쳐 19개의 정책 제안을 20쪽 분량으로 넣었다. 그것 역시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관악구민이 참여해 만드는 도시 경관 등 바로 시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제안들이었다. 참여한 구의원 11명의 연수 소감문도 넣었다. 세금으로 간 해외연수를 단 한 명의 의원도 허투루 보내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구의원들은 연수를 떠나기에 앞서 3회에 걸친 사전교육을 진행했다. 중국 연수 보고서에 있는 방문국과 방문기관 일반 정보는 이때 다 들었다. 일정도 덴마크 청소년연합회,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 스웨덴 환경보호국, 스톡홀름 지역 교통회사 방문 등으로 촘촘하게 짜 넣었고, 관광용 전세버스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선진국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느껴보려는 노력이었다. 30대 기초의원들은 현지에서 보고 들은 것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덴마크 해외연수 솔직 토크’란 이름으로 자신의 유튜브 채널(이경환TV)에 올리기도 했다.

관악구의회는 그동안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으로 그쳤던 출장보고서를 인터넷 방송으로 생중계되는 본회의장에서 보고하도록 아예 규정을 바꿨다. 국내 기초의회 사상 최초의 시도다. 작지만 큰 변화라 아니할 수 없다.

구의원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라 할 조례안 발의 건수도 비교가 안 된다. 8대 관악구의회가 임기를 시작한 2018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간 의원 발의 조례안은 34건이었다. 이전 7대 구의회의 처음 1년간 의원 발의 조례안은 10건에 불과했었다. 조례를 최종심의하는 본회의 개최 건수 역시 8대가 7대에 비해 4회 많았다. 8대 구의회의 조례 발의 활동이 7대보다 양적으로 분명하게 활발해진 것이다.

이들이 발의한 조례안은 벤처기업 육성 및 지원, 여성장애인 출산지원금, 주차장 설치 및 관리, 인권 보장 및 증진, 생활문화 진흥 등 다양하면서도 청년이라는 주제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청년의원들의 관심이 아무래도 청년들의 문제로 쏠리기 마련이어서기도 하지만, 서울대와 고시원 등이 밀집한 관악구의 특성상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의정활동 성실성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인 ‘5분 자유발언’ 또한 차이가 난다. 5분 자유발언은 국회를 포함한 모든 선출직 의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제도로, 의원들이 행정부의 활동 전반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식 통로다. 8대 관악구의회에서는 지난해 말까지 46차례 열린 본회의에서 22명의 의원 중 14명이 27회에 걸쳐 5분 자유발언을 했다. 구의원 1인의 평균 발언 횟수가 1.2회인 셈인데, 이 중 청년의원 3인의 발언 횟수는 각각 3회씩으로 평균보다 3배에 가깝다. 지자체 정부에 대한 감시 견제 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구정 질문 역시 이들 3인의 평균 횟수는 3.7회로 전체 평균 1.6회보다 크게 높다.

이들 지표만으로 청년 정치의 우수성을 입증하기는 무리다. 물리적인 나이만 젊다고 무조건 개혁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절망스러운 한국 정치의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 피의 수혈밖에 방법이 없다. 그것도 청년이 일회용으로 소비되는 게 아니라, 청년이 정치를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례대표 청년 할당 몫으로 국회에 들어가는 것보다 기초의회에서부터 차근차근 정치를 배워나가는 게 효과적인 이유다. 미투(me too)가 아니더라도, 준비 안 된 원종건이 국회에 들어가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당론에 따라 손을 드는 일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기초의회 입성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선거제도를 비롯해 개혁해야 할 게 여러 가지다. 그것이 지금부터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윤주 씨는 최근 충남 아산시의 시장 정책보좌관 자리를 얻었다.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됐다. 구의원 되기 프로젝트는 접었대도, 풀뿌리 민주주의의 밀알이 되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산시 인구가 40만명으로 마포구와 비슷하더라고요. 방법은 다르겠지만 마포에서 못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해볼 만한 규모 아닌가요?”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