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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막눈 벗어난 할매 시인 “업어 키운 동생에 편지 쓰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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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동생들 돌보고 집안일 하라고
학교에 간 첫날 아버지에게
끌려 나와 평생 동안 학교는
단 하루 다녔다
고단한 세월은 가슴에 묻고
60년을 까막눈으로 살아야 했다
다 늙어 세월이 좋아져
학교에 다니며 글자를 배워
읽고 쓸 수 있으니 참 좋다’

늘푸른학교 늦깎이 학생 90명 #자작시집 ‘할매, 시작하다’ 펴내 #평균 나이 75세…최고령은 93세 #82세 “글 몰라 가계부 못 써 울기도”

선대순(81)씨가 자작시 ‘즐거운 학교’를 적은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군산시]

선대순(81)씨가 자작시 ‘즐거운 학교’를 적은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군산시]

전북 군산에 사는 김인덕(71)씨가 지은 시 ‘묻어버린 꿈’이다. 고된 농사일로 몸은 천근만근 무겁지만, 틈틈이 짬을 내 공부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군산시는 4일 “김씨처럼 어려운 환경 탓에 한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 90명이 지은 시 90편을 모아 『할매, 시작(詩作)하다』라는 시집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할머니들은 군산시가 2008년부터 운영해 온 ‘늘푸른학교’에서 문해(文解) 교육을 받았거나 받는 ‘늦깎이 학생’이다. 문해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군산시는 ‘비문해 제로(Zero) 학습도시 조성’을 위해 현재 42개 읍·면·동의 경로당과 주민센터 등에서 문해 교육을 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시 90편은 고난·희망·열정·행복·감사 등 5개 주제로 나뉘어 실렸다. “아직 맞춤법과 표현이 서툴지만, 할머니들이 삶의 애환을 꾸밈없이 담아 울림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

시집에 자작시를 낸 할머니 90명의 평균 나이는 75세. 늘푸른학교 최고령 학습자는 98세지만, 시를 쓴 학습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는 이정순(93)씨다. ‘늦깎이 학생의 다짐’을 쓴 이씨는 90세가 돼서야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씨는 “배운 내용을 쉽게 잊어버리지만, 선생님과 친구가 곁에 있어 어려움을 잊고 공부에 취해 하루하루 기쁘게 산다”고 말했다.

군산의 한 아파트 경로당에서 학습자들이 수준별 평가 시험을 보는 모습. [사진 군산시]

군산의 한 아파트 경로당에서 학습자들이 수준별 평가 시험을 보는 모습. [사진 군산시]

홍복례(73)씨의 시 ‘글자꽃이 피었다’는 글자를 배운 뒤 간판 글자가 눈에 보이자 그 글자가 마치 꽃이 핀 것처럼 보였다는 내용이다. 김순애(82)씨는 ‘식은 죽 먹기’를 썼다. ‘경로당 살림을 하게 되어/가계부를 적어야 하는데/글을 몰라 적지 못했다/옆집 사는 동생에게/대신 적어 달라고 하니/처음에는 해주더니/나중에는 귀찮다고/안 해줘서 울기도 했다/늘푸른학교에 다니면서/공부를 하다 보니/지금은 경로당 가계부/쓰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라는 내용이다. “학교에 다니기 전에는 글을 몰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는데 글자를 깨우치고 난 후에는 뭐든 스스로 척척 해낼 수 있는 기쁨을 표현한 작품”이다.

김점순(75)씨는 여덟 살 때부터 동생들을 업어 키우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한 서러움과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을 자작시 ‘편지 한 장’에 담았다. 김씨는 시에서 “자식들 다 떠나 없이 혼자 하는 공부 더디기만 하다”며 “이제라도 배워 업어 키운 동생들한테 편지 한 장 쓰고 싶다”고 했다. 한연순(92)씨는 ‘내 인생’이라는 시에서 “늘푸른학교가 생겨 공부한 지 어느덧 오 년 공부하는 시간이 재미있다 한 자 한 자 배우고 나니 세상이 밝아 보인다”고 노래했다.

늘푸른학교 교장인 강임준 군산시장은 “평생 읽고 쓰지 못하는 아픈 시간을 견디며 그 한을 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열정에 존경을 표하고, 문해 교육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늘푸른학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군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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