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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우니 가계부 쓰기는 식은죽 먹기”…평균 75세 할머니 시인들

중앙일보

입력

소룡동주민센터에서 문해 교육을 받는 김순애(82)씨가 자작시 '식은 죽 먹기'를 적은 도화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군산시]

소룡동주민센터에서 문해 교육을 받는 김순애(82)씨가 자작시 '식은 죽 먹기'를 적은 도화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군산시]

‘동생들 돌보고 집안일 하라고
학교에 간 첫날 아버지에게
끌려 나와 평생 동안 학교는
단 하루 다녔다

군산 늘푸른학교『할매, 시작하다』발간 #문해 교육 받은 할머니 90명 자작시 모아 #평균 나이 75세…최고령 93세 이정순씨 #“꾸밈없이 삶 애환 표현해 울림 크다”평

고단한 세월은 가슴에 묻고
60년을 까막눈으로 살아야 했다

다 늙어 세월이 좋아져
학교에 다니며 글자를 배워
읽고 쓸 수 있으니 참 좋다’

전북 군산에 사는 김인덕(71)씨가 지은 시 ‘묻어버린 꿈’이다. 고된 농사일로 몸은 천근만근 무겁지만, 틈틈이 짬을 내 공부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군산시는 1일 “김씨처럼 어려운 집안 환경 탓에 한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 90명이 지은 시 90편을 모아 『할매, 시작(詩作)하다』라는 시집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할머니들은 군산시가 2008년부터 운영해 온 ‘늘푸른학교’에서 문해(文解) 교육을 받았거나 받는 ‘늦깎이 학생’이다. 문해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시집 『 할매, 시작(詩作)하다 』에 작품을 수록한 코아루경로당 한연순(92)씨가 자작시 '내 인생'을 도화지에 옮겨 적고 있다. [사진 군산시]

시집 『 할매, 시작(詩作)하다 』에 작품을 수록한 코아루경로당 한연순(92)씨가 자작시 '내 인생'을 도화지에 옮겨 적고 있다. [사진 군산시]

군산시는 ‘비문해 제로(Zero) 학습도시 조성’을 위해 현재 42개 읍·면·동의 경로당과 주민센터 등에서 문해 교육을 하고 있다. 할머니들은 문해 교육사 30명에게서 한글과 음악·수학·영어·미술 등을 배우고 있다.

할머니들의 시 90편은 고난·희망·열정·행복·감사 등 5개 주제로 나뉘어 실렸다. “아직 맞춤법과 표현이 서툴지만, 할머니들이 삶의 애환을 꾸밈없이 담아 울림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

시집에 자작시를 낸 할머니 90명의 평균 나이는 75세. 늘푸른학교 최고령 학습자는 98세지만, 시를 쓴 학습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는 이정순(93)씨다. ‘늦깎이 학생의 다짐’을 쓴 이씨는 90세가 돼서야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씨는 “배운 내용을 쉽게 잊어버리지만, 선생님과 친구가 곁에 있어 어려움을 잊고 공부에 취해 하루하루 기쁘게 산다”고 말했다.

금강파크경로당에서 문해 교육을 받는 선대순(81)씨가 예쁘게 그림까지 그린 자작시 '즐거운 학교'를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 군산시]

금강파크경로당에서 문해 교육을 받는 선대순(81)씨가 예쁘게 그림까지 그린 자작시 '즐거운 학교'를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사진 군산시]

홍복례(73)씨의 시 ‘글자꽃이 피었다’는 글자를 배운 뒤 간판 글자가 눈에 보이자 그 글자가 마치 꽃이 핀 것처럼 보였다는 내용이다. 김순애(82)씨는 ‘식은 죽 먹기’를 썼다. ‘경로당 살림을 하게 되어/가계부를 적어야 하는데/글을 몰라 적지 못했다/옆집 사는 동생에게/대신 적어 달라고 하니/처음에는 해주더니/나중에는 귀찮다고/안 해줘서 울기도 했다/늘푸른학교에 다니면서/공부를 하다 보니/지금은 경로당 가계부/쓰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는 내용이다. “학교에 다니기 전에는 글을 몰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는데 글자를 깨우치고 난 후에는 뭐든 스스로 척척 해낼 수 있는 기쁨을 표현한 작품”이다.

김점순(75)씨는 여덟 살 때부터 동생들을 업어 키우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한 서러움과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을 자작시 ‘편지 한 장’에 담았다. 김씨는 시에서 “자식들 다 떠나 없이 혼자 하는 공부 더디기만 하다”며 “이제라도 배워 업어 키운 동생들한테 편지 한 장 쓰고 싶다”고 했다.

늘푸른학교 교장인 강임준 군산시장이 지난해 6월 열린 '제12회 문해한마당' 시화전을 감상하고 있다. 군산시는 매년 늘푸른학교에서 문해 교육을 받는 할머니들의 시와 그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군산시]

늘푸른학교 교장인 강임준 군산시장이 지난해 6월 열린 '제12회 문해한마당' 시화전을 감상하고 있다. 군산시는 매년 늘푸른학교에서 문해 교육을 받는 할머니들의 시와 그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군산시]

늘푸른학교 문을 두드린 지 5년이 넘은 한연순(92)씨는 ‘내 인생’이라는 시에서 “늘푸른학교가 생겨 공부한 지 어느덧 오 년 공부하는 시간이 재미있다 한 자 한 자 배우고 나니 세상이 밝아 보인다”고 노래했다.

늘푸른학교 교장인 강임준 군산시장은 “평생 읽고 쓰지 못하는 아픈 시간을 견디며 그 한을 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열정에 존경을 표하고, 문해 교육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늘푸른학교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순애(82)씨가 자작시 '식은 죽 먹기'를 도화지에 옮겨 적고 있다. [사진 군산시]

김순애(82)씨가 자작시 '식은 죽 먹기'를 도화지에 옮겨 적고 있다. [사진 군산시]

군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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