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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박은식이 불러낸 동명왕, 일제로부터 독립을 꿈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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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고구려 옛 서울에서 피어난 혁명의 역사

평양 역포구역에 있는 고구려 동명왕릉. 1993년 북한이 복원한 모습. [중앙포토]

평양 역포구역에 있는 고구려 동명왕릉. 1993년 북한이 복원한 모습. [중앙포토]

내일이면 설날이다. 우리나라 옛 풍속에 설날에는 윷놀이를 하고 윷점을 쳤다. 윷놀이는 다른 나라에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민속놀이다. 전북 임실·경남 포항 등의 윷판 암각화에서 보듯 그 유래가 꽤 오래됐다. 고려시대에는 세모에 밤을 지새우며 윷놀이를 했고, 조선 후기에는 윷놀이와 함께 윷점도 유행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여러 신문에 정월 대보름 전국 곳곳의 척사대회 기사가 실렸다.

서간도 배경 『동명성왕실기』 저술 #한사군서 벗어난 광복의 뜻 기려 #“연개소문은 영국의 크롬웰” 평가 #3·1운동의 만민평등 예견한 듯

윷놀이에는 윷판과 윷가락이 필요하다. 윷판의 원리는 조선 중기 개성의 유학자 김문표가 처음 스물여덟 별자리의 천체 주행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했다. 윷가락을 던져 나오는 도·개·걸·윷·모는 각각 돼지·개·양·소·말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근대 역사가 신채호는 이를 고구려의 5부 전통과 연결된 것으로 이해했다. 고구려 옛 서울 국내성에서 윷판 유적이 발견된 사실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윷놀이의 오랜 연원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고구려 인식에서 고구려 윷놀이는 최근의 일이다. 전통적으로 고구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나라를 세운 주몽이다. 주몽이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그가 고구려의 첫 번째 임금 동명성왕이라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대로다. 동명왕 주몽의 신이(新異)한 사적은 고구려 사람들은 물론 고려시대에도 평민 남녀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평양에 동명왕을 제사하는 숭령전이 세워져 지역적 전승이 지속됐고, 조선 말기에는 평양의 옆 고을 중화에 위치한 동명왕 묘소가 왕릉으로 격상돼 지역민의 자존감이 높아졌다.

고려 이규보 ‘동명왕편’에 담긴 자부심  

일제강점기 유리원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유리원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동명왕이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가 『삼국사』의 동명왕 역사를 읽고 지은 ‘동명왕편’이 한국 한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규보 스스로는 무신 집권기에 벼슬자리를 구하려고 무신이 좋아할 만한 영사시(詠史詩·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다룬 시)를 지은 것이지만, 그 안에는 고구려 동명왕의 신이한 사적이 중국 고대신화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부심이 충만했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고려가 요나라와의 전란을 겪은 현종 임금 때 고구려 중심의 『삼국사』를 편수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삼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명왕편’은 고려 무신에게 요나라와 항전하며 끝내 격퇴한 고려의 전쟁사를 일깨워줬을지도 모른다.

이규보의 ‘동명왕편’ 이후 언제 다시 동명왕에 관한 작품이 나왔을까. 학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892년 평양 감영에서 간행된 『동명사제』라는 작품이 주목된다. 당시 동명왕의 묘소를 동명왕릉으로 추봉하는 조처가 내려지자, 이를 성사시킨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이 자신의 문객 김재소를 시켜 ‘동명왕편’과 비슷한 형식의 작품을 짓도록 한 것이다.

김재소는 고구려 역사책에 더해 평안도에 전해지던 고씨 가승(家乘·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간단한 가계를 기록한 책)을 읽고 나서 『동명사제』를 지었는데, 여기서 고씨 가승이란 동명왕의 45세손 고기가 후손에게 비전했다는 『고창암가승』을 가리킨다.

참고로 1909년 돈영찬이라는 인물이 가승을 갖추어 을지문덕의 후손임을 주장했는데, 이 가승에 따르면 을지문덕의 17세손 을지수가 고려 중기 묘청의 난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워 돈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동명왕 후손의 가승과 을지문덕 후손의 가승이 수면 위로 떠오르던 예사롭지 않은 지역적 정서를 짐작할 만하다.

김재소의 『동명사제』가 나온 후 다시 동명왕에 관한 작품이 나왔다. 1911년 박은식은 서간도 회인현에 망명해

『동명성왕실기』를 지었다. 그는 『동명사제』가 나올 당시 민병석의 도움으로 동명왕릉을 관리하는 새로운 벼슬자리의 첫 번째 벼슬아치에 임명된 적이 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옛 서울에서 동명왕 전기를 지을 때 가슴이 뭉클했을 것이다. 동명왕릉을 보살피는 임무를 수행했던 사람이 실제 동명왕이 활약했을 본고장에 와서 동명왕 전기를 지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을까.

동명왕에 관한 세 번째 작품인 박은식의 『동명성왕실기』가 앞의 두 저작과 다른 점은 서간도라는 공간의 역사성이다. 이규보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동명왕을 노래했다. 개성은 고려의 중심이면서 고구려의 변방이었다. 김재소는 조선의 주변 평양에서 동명왕을 노래했다. 평양은 조선의 주변이면서 고구려의 새 중심이었다.

동명왕릉 전각 내부에 있는 동명왕 그림(위)과 근대 역사학자 박은식(아래)이 지은 고구려 장군 명림답부 전기. [중앙포토]

동명왕릉 전각 내부에 있는 동명왕 그림(위)과 근대 역사학자 박은식(아래)이 지은 고구려 장군 명림답부 전기. [중앙포토]

박은식은 조선의 바깥 서간도에서 동명왕을 노래했다. 서간도는 조선의 바깥이면서 고구려의 옛 중심이었다. 동명왕 이야기는 개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서간도로 옮겨오면서 본래의 현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박은식은 서간도의 한인에게 왜 동명왕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나라를 잃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압록강 건너 고구려 옛 서울에 흘러들어온 한인에게 왜 동명왕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동명성왕실기』가 현전하지는 않지만 이 책과 자매 관계에 있는 『발해태조건국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나라가 사군을 설치한 날 이천여 년 조선 역사가 세계상에 말살됨을 당했더니 동명성왕이 나서 고구려를 건설하여 우리 조국을 광복하였으며, 당나라가 도호부를 설치한 날 칠백여 년 고구려 역사가 지하에 침몰함을 보았더니 발해 고왕이 나서 해동성국을 건설하여 우리 민족을 구제하였다.” 즉, 고구려 동명왕의 위업은 단순한 건국이 아니라 광복이라는 뜻이었다.

광복과 더불어 중요한 교훈이 다름 아닌 혁명이었다. 박은식이 서간도에서 지은 또 다른 고구려 역사물에는 『명림답부전』과 『천개소문전』이 있었다. 고구려 차대왕(7대)을 죽이고 신대왕을 옹립한 명림답부나, 고구려 영류왕(27대)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한 연개소문은 전통적으로 반역자로 취급됐다. 그렇지만 박은식은 이들을 영국사에서 청교도혁명의 주역 크롬웰에 비견되는 혁명가로 보았다. 명림답부의 혁명은 고구려의 민권을 탄압하는 폭군의 전제정치에 대한 투쟁으로, 연개소문의 혁명은 고구려의 정치를 부패시킨 교목세가(喬木世家·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한 집안)의 귀족정치에 대한 투쟁으로 해석했다. 고구려 역사에서 광복의 위인과 더불어 혁명의 위인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폭군 체제 물리친 고구려 장수 명림답부

흥미로운 것은 명립답부의 혁명에 대한 상황 설정이다. 고구려 차대왕이 형 태조왕의 왕위를 찬탈하고는 고구려 신민을 탄압하자 고구려 종교 지도자 명림답부는 “저 독부가 죽지 않으면 천리와 인도가 멸망해 신성한 종교와 민권이 망하리라”고 비분강개한다. 별궁에 유폐돼 있던 태조왕이 세상을 떠나자 명림답부는 국장을 치르기 위해 모인 군중에게 호소하여 즉석에서 민군을 조직하고 차대왕 의왕군과 싸워 마침내 승리한다. 전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국장을 치르기 위해 모인 군중을 독려하여 종교 지도자가 전제정치와의 투쟁을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박은식의 『명림답부전』을 읽은 독자에게 후일 고종의 죽음과 국장 준비, 그리고 조선 종교계의 3·1운동은 무엇이었을까. 명림답부의 혁명은 3·1운동의 예견이었을까.

서간도에서 고구려의 광복사와 혁명사가 피어날 무렵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타올랐다. 만주족의 전제정치에 대한 광복과 혁명의 불길이 뜨겁게 번질 때 박은식은 문제작 『몽배금태조』를 완성했다. 이 소설 속에서 금나라 태조는 백두산에서 만난 주인공 무치생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서양 근세에는 루소·크롬웰·루터 같은 인물이 정치혁명을 하고 종교혁명도 했는데, 어째서 조선에서는 열혈아가 나와 정치혁명과 학술혁명을 이룩하지 못했느냐”라고. “평등주의 신문명의 건설이라는 세계사의 흐름에서 본다면 지금 대동민족의 청년이야말로 국가와 국가의 평등, 인간과 인간의 평등을 위한 혁명에 헌신하고 분투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중국 대륙에서 혁명의 기치가 솟아오를 때 고구려의 옛 서울에서도 혁명사가 피어났다. 이듬해 박은식은 고구려의 옛 서울에서 중국 대륙으로 움직였다. 한국의 혁명을 안고 중국의 혁명에 들어간 것일까.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