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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살 때부터 죽음 느꼈다“ 이어령의 36억86번째 설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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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어령 전 장관은 ’모두 한 방향으로 뛰어가면 1등은 정해져 있지만 각자 좋아하는 방향으로 뛰면 모두가 1등이 된다“고 말했다. [사진 JTBC]

이어령 전 장관은 ’모두 한 방향으로 뛰어가면 1등은 정해져 있지만 각자 좋아하는 방향으로 뛰면 모두가 1등이 된다“고 말했다. [사진 JTBC]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87)을 JTBC가 만났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생명이 자본이다』 등 160여권의 저작을 통해 한국사회의 앞날을 제시해온 그다. 평생의 족적과 젊은이들에게 주는 말을 담은 JTBC 다큐멘터리 ‘헤어지기 전 몰래 하고 싶었던 말-이어령의 백년 서재에서’는 26, 27일 오전 9시 30분 2부작으로 방송된다. 인터뷰는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이 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암 선고? 쓰고 싶은 글 쓰고 죽어야지 #지금은 탄생, 생명 이야기 쓰는 중 #AI 올라타라, 그럼 천리마 된다 #이젠 AI 탄 사람 세계 지배자 될 것

4기 암 선고에도 적극적인 치료 대신 글쓰기를 택했다.
“암이란 얘길 듣는 순간 ‘어쩌지 아직도 글 쓸 게 남았는데’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죽어야지’ 생각이 들었다. 글 쓰는 사람이니 죽음이 다가오더라도 죽음을 글로 쓸 수 있어 행복하다. 절대로 병원에서는 안 죽겠다, 내가 살던 곳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숨을 넘기겠다, 그게 내 마지막이자 최고의 희망이다.” 

인생은 자궁에서 무덤으로 가는 과정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은.
“아이러니하게 죽음 아닌 탄생, 생명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인간, 한국인, 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에 대한 얘기다. 인생은 아기집 ‘자궁(womb)’에서 ‘무덤(tomb)’으로 가는 과정이다. 어머니의 배 속에 바다(양수)가 있었고, 최초의 나는 거기서 물고기였다. 그리고 그 이전 36억 인류역사가 있었다. 내 나이 36억86세다.”
일찍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말로 큰 울림을 줬다.
“‘메멘토 모리’엔 두 가지가 있다. 이왕 죽을 거 먹고 마시고 즐기자. 술꾼들의 자세다. 기독교의 메멘토 모리란 어차피 죽으니 죽음을 생각하며 경건하고 착하게 살자다. 오늘 하루만을 생각하는 찰나주의냐, 영원한 죽음 앞에 짧은 생명을 가치 있게 살 것이냐다. 내가 죽음을 처음 느낀 건 6세 때였다. 쨍한 대낮에 혼자 굴렁쇠를 굴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두려움, 불안을 처음 느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행사로 기획한 굴렁쇠 소년도 여기에서 나왔다. 떠들썩한 축제(탄생) 속에 죽음이 있고, 찬란한 대낮에 죽음의 어둠이 있고, 이처럼 생과 죽음이 등을 마주 댄 부조리한 삶. 내 평생의 화두였다.”
문학가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늘 책을 읽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글자를 모르는 나를 안고 책을 보시고, 내가 열나고 아파서 누워 있는 옆에서도 책을 보셨다. 『천로역정』 『무쇠탈』 『장발장』 같은 문학책들이다. 어머니 덕에 나는, 사람은 무조건 책 읽고 글 쓰는 거로 알고 컸다. 4살 때부터 누님들이 내버린 책 여백에 동시를 썼다.”
국문과에 진학했는데, 반대는 없었나.
“그때도 공부 좀 잘하면 의대나 법대 가라 그랬다. 하지만 내가 문과를 가서 문학을 했기 때문에 6·25 등 어렵고 절망적인 상태를 이겨낼 수 있었다. 젊음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며 나를 살린 작은 불빛이 시였다. 법대나 의대 갔다면 80까지 내가 글 쓸 수 있었겠나. 인문학이 좋은 거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있는 그의 서재. 8대의 컴퓨터를 하나의 자판에 연결해 쓰고 있다. 데이터 베이스로 활용하거나 멀티태스킹을 하기 위해서다. [사진 JTBC]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 있는 그의 서재. 8대의 컴퓨터를 하나의 자판에 연결해 쓰고 있다. 데이터 베이스로 활용하거나 멀티태스킹을 하기 위해서다. [사진 JTBC]

전방위로 활동한 문화 아이콘이었다.
“교수, 언론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안 해 본 직업이 없고 시, 희곡 등 안 써본 글이 없다. 나를 어떤 프레임에 가두지 않았고, 갈증을 달래기 위해 평생 우물을 팠다. 시라는 우물, 평론이라는 우물, 심지어 원하지 않았지만 행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이란 우물도 팠다. 마지막 우물이 죽음이라는 우물, 무덤이겠지.”
AI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디지로그’ 개념을 선창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친 ‘디지로그’가 돼야 비로소 후기 정보화 사회가 온다고 10년 전부터 주장했다. 아마존이 오프라인 매장을 지으며 온·오프가 합쳐지는 게 디지로그다. 디지털 맵 구글 어스가 모든 길거리 정보를 디지털화하고, 그게 GPS가 돼서 자율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게 디지로그다. 우리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자고 외쳤건만 아쉽다. 빨리 사람들이 캐치해서 대응했으면 알파고도 한국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인간보다 잘 뛰는 말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라타야 한다. 뒤쫓아가면 뒷발에 차여 죽는다. AI도 마찬가지다. AI에 올라타서, 기계가 할 수 있는 일과 기계가 못하는 걸 합쳐야 한다. 알파고가 아무리 똑똑해도 이세돌한테 한 방 먹었다. AI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올라타면 너는 천리마가 된다. 이제는 AI 탄 사람이 세계의 지도자, 지배자가 된다.”

메멘토 모리 … 젊을수록 죽음 더 생각해야

젊은이들에게 하고픈 말은.
“우리 때는 총성이 들리는 전쟁이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총성이 들리지 않는 전쟁을 치르며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아리고 쓰리다’에 ‘랑’자를 붙이면 ‘아리랑 쓰리랑’ 천국이 되듯 아픔을 창조적인 힘으로 바꿀 수 있다. 젊은이들한테만 꿈꾸라고 해서도 안 된다. 꿈을 사회가 같이 꿔줘야 이루어진다. 혼자서 꾸면 꿈으로 끝나지만,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된다. ‘메멘토 모리’도 들려주고 싶다. 죽음만큼 절박하고 중요한 게 없다. 그래야 산다는 게 뭔지 안다. 사막의 갈증, 빈 두레박의 갈증을 느낀 자만이 물의 맛, 삶의 맛을 아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젊기 때문에 더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삶을 인식하는 가장 빠른 길이고, 앞을 찾아갈 수 있는 올바른 길이다.”

정리=양성희 논설위원 sh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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