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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의 정변|청산리 전투 그 날의 백골 아직도 증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중국 땅에서 맞은 광복 44돌 아침에는 광복절의 기쁨과 의의를 되새겨본다는 뜻에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청산리 전투의 유적지률 답사하기로 했다. 나와 연변대학의 박창욱 교수, 김응호· 김춘선 선생, 그리고 서울대학의 신용하 교수 등 일행은 일찌감치 아침 식사를 끝내고 숙소를 출발, 용정과 두 도구를 거쳐 일단 서고성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서고성은 발해의 토성으로서 현재 길림성 중첩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기도 한 중요한 유적지이므로 꼭 둘러봐야 할 곳이었다.
발해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족에 의해 건국된 국가로서 18세기의 실학자들이 비로소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기 시작, 요즘은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어 현재 한중역사학계의 큰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발해의 유적지들이 중국영토 내에 산재해 있는 탓인지 중국에서는 이에 대한 발굴이 매우 활발한 모양이었다. 8월U일에 잠깐 들러보았던 연변민족박물관에도 발해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많았다.
실제로 그러한 유물과 유적들을 직접 점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보다 열심히 공부해야만 우리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정립해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였다. 종래 일본학자들은 발해의 수도가 동경성뿐이었다는 학설을 퍼왔으나 요즘에는 발해가 돈화· 화룡의 서고성, 동령의 동경성, 휘춘 등으로 수도를 옮겨다녔다는 설도 대두되고 있다.

<2백여 가구 살아>
이곳 서고성에서 작년 8월에 정효공주의 무덤과 발해삼채가 발굴되었다고 하니 이는 아마 후자의 학설을 뒷받침해 주는 듯하다.
서고성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화룡 현 소재지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한 두시간 달려 도착한 곳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청산리, 바로 그곳이었다.
행정구역상 화룡현 부흥향에 속하는 이곳 청산리 마을은 큰산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약2백 가구 가량이 살고 있다는데 마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뛴 것은 큰 소학교였다.
방학 중이어서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 넓은 운동장을 들여다보다 마침 학교 앞을 지나는 청년이 있어 말을 건넸다. 청년은 자신이 중국인이며 이름은 수전생이라 한다고 했다.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말을 제법 갈 구사하고 있었다.
그때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인 김응호 선생이 이 청년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감아 흔드는 게 아닌가, 수년전 이곳에서 목재 운반 일을 할때 만나 알게된 사이라고 했다.
일행은 이 같은 우연의 만남을 무척 기뻐하면서 수전생에게 백운평으로의 안내를 부탁하기로 했다. 백운평이란 청산리 마을 뒤에 있는 산골짜기를 말하는데 그 곳까지 가는 길을 생각 밖으로 평탄하였다. 수전생의 말로는 화룡현이나 안도·장백현 등에는 임업을 주로 하는 화룡 황구장·심두봉영림촌·허가동림장 등이 있어 목재운반에 편리하도록 길을 잘 닦아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백운평 계곡으로 가는 도중에는 목재를 가득 실은 화물트럭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길 뚫어 벌목 한창>
백운평 골짜기를 향해 얼마가지 않았을 때 오른편 수출 속에 청산리항일전적지라고 쓴 비가 나타났다. 나무로 만든 이 비의 옆면에는 화룡현인민정부립 1986년 9월 3일이라 쓰여져 있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일제의 경신년 토벌에 직면하여 우리 항일무장부대는 홍범도의 영도 하에서 유동작전을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1∼22일에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어랑촌 등지에서 적들을 호되게 타격 함으로써 인민들의 반일투쟁 정신을 북돋웠다.』
주지하다시피 청산리 전투는 우리 독립전투사상 최대의 대승리를 거둔 싸움이며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이범석 장군 등이 지휘하여 이끈 대첩이다.
그런데 어째서 홍범도의 전공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공산체제인 중국에서는 민족진영의 독립운동을 고의로 도외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 또 한번 체제를 극복할 수 없는 학문의 한계성을 절감하였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사 연구동향은 1930년대 이후에 활발했던 공산진영의 활약상에 치중돼 있어 연변대학의 박창욱 교수 등도 이곳 백운평은 초행길이라 할 정도였다.
기념비를 뒤로하고 6∼7km가량 더 올라가니 이제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을 만큼의 깊은 골짜기가 나왔다. 먼젓번에 가보았던 봉오동 골짜기보다도 훨씬 숲이 우거져 하늘조차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수전생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 계곡 밑에는 약간의 평지가 있고 거기 마을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 마을은 백운평 전투때 일본군의 방화로 없어졌으며 그 때문에 지금도 백운평 골짜기에서는 백5골이 자주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마을 통째로 소실>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는 끄트머리까지 올라간 후 일행은 차에서 내려 산림을 헤치며 백운평 계곡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을 찾았으나 빽빽히 우거진 나무들로 인해 그런 곳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계곡을 좀 내려와 백운평의 산세를 일부나마 볼 수 있는 곳에서 사진촬영을 한 후 일행은 감시 쉬면서 청산리 전투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였다.
l920년대에 물어와 우리독립군들이 본격적인 전투를 수행하며 승리를 거두어가자 일제는 이들을 토벌하지 않고서는 한국에 대한 완전한 식민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0년 10월 일제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나남사단과 시베리아 및 만주에 출동해 있던 일부 병력을 동원해 총원 2만 5천명으로 소위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 작전이었다.

<일군 2만명 동원>
이에 맞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해 대한독립군의 홍범도 부대와 의민단·신민단·국민회·의군부의 독립군부대 등은 힘을 합쳐 일본군을 무찌를 것을 다짐했고, 마침내 일본군의 산전 보병부대가 백운평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을 매복공격, 3백여명을 살상하는 대전승을 거두었다. 이 청산리 전투에서의 대승은 봉오동전투와 더불어 우리 민족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또한 재만한인사회의 인척·물적 지원 하에서 그 승리가 가능했었음을 되살려 불때 비단 몇몇 독립군부대들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우리 한민족 전체의 승리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북로군정서의 한 이름 없는 법사였던 이우석 옹에게서 청산리 전투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고, 또 이범석 장군의 자부 『우둥불』을 통해서도 당시의 전황을 읽은바 있었으므로 깊디깊은 백운평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70년 전 그 날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다시 백운평 계곡을 더듬어 내려오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먼 이국 땅에서 한줌 흙으로 돌아가 버린 우리 선열들의 고귀한 영령 앞에 삼가명복을 빌었다. 그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조국의 광복만을 생각하고 목숨을 바쳤던 그 분들에 비해 오늘의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잇는 것인지 새삼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후손의 안타깝고 착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묵만이 깔려 있는 백운평 골짜기를 내려와 다시 자동차를 달린 곳은 백두산.
사금구·화립자를 거쳐 삼도구로 향하는 길가에도 역시 숲이 우거져 있었고 송강에 이르자 여기서부터 천지까지는 약60리라고 하였다.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지 않았고 노면도 고른 편이었으나 시속 30km정도의 속도밖에는 내지 못하였다. 길 주위에는 백화목이란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것들이라 그런지 무척 단단해 보였다.

<천지 물결 "아른">
송강에서 천지 바로 밑까지는 약 2시간 정도 걸렸을까.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차가워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두산이 해발 2,744m라고 하니 확실히는 모르지만 평지보다 상당히 기온이 낮을 것은 정한 이치 아닌가. 얘기들은 대로 미리 준비해 왔던 겨울옷을 꺼내 입고 장백산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
첫 번째 출입수속을 밟고 다시 30리 이상을 달렸는데, 중간 중간에서 출입허가증을 검사하는 통에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외국인 뿐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고, 백두산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어디든지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반드시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처럼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한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이상하고 또 불편한 제도였다.
천지 앞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날은 이미 어두워 일행은 천지 앞에 있는 악화보관에 투숙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호텔의 방에는 자물쇠가 전혀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호텔주인은 절대 도둑은 없으니 안심하라고 큰 소리만 치는 것이어서 결국 그 말을 믿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날이 밝는 대로 천지에 가보기로 일행과 약속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낮에 본 청산리의 골짜기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내일 새벽에 만나게될 천지의 신비로운 모습을 상상하느라 몸은 고단한데도 잠은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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