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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트럭' 탐내던 소년, 30년 후 '브릭 전함'을 만났을 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장현기의 헬로우! 브릭(1)

전시 기획자로  활동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브릭 아트에 매료돼 제주도에 브릭 아트 테마파크를 오픈했다. 장난감으로 여겨지던 브릭이 예술 소재가 될 수 있고, 무한한 잠재력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재미있고도 놀라운 사실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편집자>

여러분이 처음으로 가졌던 브릭 완구를 기억하시나요? 저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첫 번째 브릭 완구는  두 살 많은 사촌 형의 ‘레고’ 파워트럭 시리즈였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이던 1980년대에는 레고 같은 고가의 장난감을 가질 수 있는 어린이는 별로 흔하지 않았습니다.

외교관이셨던 큰아버지 덕분에 사촌 형은 어릴 적부터 ‘오너 레고 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고, 형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온 동네 아이들의 선망 대상이었죠. 탁상시계를 가져다 놓고 딱 10분만 가지고 놀 수 있게 선심을 쓰던 형이 얼마나 얄미우면서 부러웠던지. 슈퍼 대마왕 구슬의 소유권을 넘기는 형의 친구에게 자그마치 30분을 허락하던 인생 최초의 뇌물수수 현장을 지켜보며, 줄 수 있는 건 핸드메이드 딱지뿐이던 8살짜리 꼬맹이는 절망하곤 했죠. 하지만 그 사촌 형은 지금 레고를 가지고 놀던 기억조차 희미하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81년 출시된 레고 파워트럭 시리즈. [사진 브릭링크닷컴]

81년 출시된 레고 파워트럭 시리즈. [사진 브릭링크닷컴]

제가 다니던 학교는 학생 수가 많아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살던 사촌 형과 저는 같은 학교에 다녔고, 저는 매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죠. “제발 이번 학기에도 사촌 형이랑 오전·오후반 갈라지게 해주세요!” 사촌 형과 오전·오후반이 갈라져야만 최소 두세 시간은 넉넉히 저 혼자 형의 레고 브릭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질 수가 있었기 때문이죠. 기도 덕분인지 거의 매 학기 오전, 오후반이 갈라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사촌 형이 학교에 가고 없는 틈을 타서 혼자서 큰아버지 집을 방문했습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시간제한도 없이 매일 새로운 모양으로 레고를 조립한 저는, 만들어 놓은 레고를 한참이나 감상하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늘 아쉽지만 완전히 분해해 다시 상자에 담아 두었죠. 그렇게 저는 운 좋게도 초등학교 시절 내내, 대부분의 또래 아이들에게 절대 허락되지 않던 ‘레고 놀이’라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중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장난감들과는 이별했습니다. 여자친구가 생겼고, 록 밴드와 헤비메탈에 심취했으며 장난감 대신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공놀이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었죠. 제가 다시 완구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 결혼하고 저 같은 개구쟁이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부터입니다. 쌍둥이 아이들과 집에서 놀아주는 것 중 최고는 역시 장난감 놀이었고, 그중에서 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당연히 레고였습니다.

아이들 생일이나 성탄절, 어린이날 같은 특별한 날이면 저는 대형 마트에서 아이들에게 사다 줄 레고를 골라야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가격의 레고 제품을 살 때마다 ‘30년 전에도 귀했던 이 완구가 아직도 너무 귀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죠. 아이들은 제가 그랬던 것처럼 레고를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다만 저처럼 20분을 걸어가서 몰래 가지고 놀 필요 없이 언제나 방안에 레고 블록들이 즐비하다는 점은 달랐죠.

집집마다 쌓여 있는 레고부품들. [사진 브릭캠퍼스]

집집마다 쌓여 있는 레고부품들. [사진 브릭캠퍼스]

우리 집에는 레고 박스가 테트리스처럼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아이들을 키우는 집들은 대부분 다 그랬을 겁니다. 그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닌자고, 키마, 토이스토리 등 시리즈별로 다양했고 부모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계속해서 새로운 시리즈가 출시되었습니다. 아이들 방안을 레고 박스가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저를 포함한 부모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리즈를 공급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죠.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제가 어릴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레고를 갖고 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레고 브릭을 마치 프라모델처럼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시리즈를 접하면 반드시 매뉴얼대로 정확히 조립하고 방 안 한 곳에 전시하면 끝이었습니다. 아! 레고 브릭의 위대함이 사라졌습니다. 레고가 오랜 세월 동안 지구 상 가장 위대한 완구였던 이유는 바로 언제든 해체하여 다른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완전히 소멸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이 브릭들을 분해하고 섞어서 새로운 걸 만들어 보자’고 했지만 아이들은 절대 안 된다고 하더군요. 자신들이 매뉴얼대로 완성한 닌자고, 키마, 마인크래프트 등의 그 모양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콘텐츠 등과 손잡고 계속해서 새 제품을 출시해야만 하는 회사의 사업 전략을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더 이상 레고 브릭이 제 어린 시절처럼 창의력, 상상력을 키워주는 최고의 재료가 되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집이라면 특히 남자아이들을 키우는 집에는 레고 박스들이 테트리스처럼 쌓여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진 브릭캠퍼스]

아이들을 키우는 집이라면 특히 남자아이들을 키우는 집에는 레고 박스들이 테트리스처럼 쌓여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진 브릭캠퍼스]

브릭캠퍼스 서울에 방문한 관객들이 매뉴얼없이 저마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창작한 작품들. [사진 브릭캠퍼스]

브릭캠퍼스 서울에 방문한 관객들이 매뉴얼없이 저마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창작한 작품들. [사진 브릭캠퍼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흘러 제가 레고 브릭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2013년이었습니다. 전시 기획자가 된 저는 우연한 기회에 서울의 한 전시장에서 열린 토이 페어를 방문했다가 레고 부스 앞 유리 케이스에 전시된 1m가 넘는 초대형 레고 우주전함을 보게 된 것입니다. ‘와 이런 크기도 판매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스태프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이건 판매할 수 없는 브릭 아티스트의 작품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앗! 작품? 그리고 브릭 아티스트? 오랫동안 잠들었던 브릭 완구를 향한 열망에 강력한 호기심까지 더해져 전시 기획자인 저를 온통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날이 브릭캠퍼스가 시작된 역사적인 첫날이 된 셈입니다. 저는 그 날 이후부터 곧바로 브릭 아트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라는 긴 준비 끝에 마침내 세계 최초 브릭 아트 테마파크인 브릭캠퍼스의 문을 열게 되었죠.

브릭 아티스트 주지현의 ‘우주전함 아르카디아’ 작품을 관객들이 보고 있다 현재 브릭캠퍼스 제주에 전시중이다. [사진 브릭캠퍼스]

브릭 아티스트 주지현의 ‘우주전함 아르카디아’ 작품을 관객들이 보고 있다 현재 브릭캠퍼스 제주에 전시중이다. [사진 브릭캠퍼스]

앞으로 저는 이 칼럼을 통해서 브릭 아트의 놀라운 세계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브릭으로 쌓아 올린 예술작품들을 만날 준비가 되셨나요?

(주)브릭캠퍼스 대표이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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