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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경록의 이코노믹스

위기 때 썼던 구조조정, 기술투자, 원화 약세가 돌파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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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20년 한국경제 살릴 세 가지 처방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성장 원동력을 세 가지만 꼽으라면 원화 약세·구조조정·기술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원화 약세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나타났다. 외환위기 때는 구조조정이 동반되면서 당시 520%에 달했던 30대 재벌 부채비율이 지금은 200% 아래로 떨어졌다. 기술투자는 2000년대 초반 정보통신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과거 한국 경제를 한 단계 성장시킨 이 세 가지가 지금 구조적 저성장에 빠져 있는 한국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차례로 짚어봤다.

독일 선제적 개혁으로 경제 성장 #일본은 부실채권 처리 못 해 침체 #패러다임 변화 때 기술 추격 가능 #한국은 지금 방향성 뚜렷하지 않아

우선, 환율은 수출이 성장 동력인 나라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수출 비중이 1990년대 20%대를 거쳐 지금은 35%에 달한다. 수출 증가와 함께 경제가 한 단계씩 성장했던 배경에는 바로 환율 상승이 있었다. 외환위기로 환율이 오른 시기에 수출 비중은 35%,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는 43%에 이르기도 했다.

선진공업국 역시 환율에 희비가 엇갈린다. 일본은 2011년 70엔대까지 떨어졌던 엔화 환율이 2013년 아베 정부가 들어선 뒤로 계속 상승해 지금은 108엔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일본 GDP에서 수출 비중은 18% 수준이지만 1990년대에 비해서는 거의 배로 늘어났다. 최근 성장동력을 다시 수출에서 찾고 있다는 얘기다.

더 놀라운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은 수출 비중이 GDP의 47%에 달한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유로화 단일통화로 인해 독일의 실질 환율은 유로화 도입 이후 거의 변화가 없다. 의도하지 않은 환율 저평가가 독일 경제 성장의 일등공신이 된 셈이다.

개혁 시기 놓치면 경제 위축

한국은 축적된 자본을 지속해서 해외로 내보내면서 통화 약세 기조를 유지해 우호적 수출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가계자산이 국내 부동산에 몰리고 있다. 이를 해외자산에 투자하면 그 과정에서 원화를 외화로 바꾸면서 시장을 통해 원화 약세를 유도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국 통화 약세 효과는 구조조정과 함께 생산성을 강화해 효율적 경제 구조를 갖췄을 때 커진다는 점이다. 독일의 수출 증가와 경제 성장은 통화통합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로 회원국의 남유럽 국가들이 통화 통합 이후 통화 고평가를 즐기면서 소비를 늘리고 있을 때 독일은 구조개혁에 나섰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골자로 한 하르츠(Hartz) 개혁안이 2003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개혁 피로감 때문에 개혁안을 만든 슈뢰더 총리는 물러났지만, 그 과실은 국민에게 돌아갔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수출을 동력으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이다.

GDP 대비 주요국 수출 비중

GDP 대비 주요국 수출 비중

일본은 잃어버린 20년 동안 구조개혁에 애로가 많았다. 1980년대 자산 버블이 꺼지면서 보유하게 된 막대한 부실채권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투자가 활성화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세계의 산업 지형이 정보기술(IT) 중심으로 바뀔 때 때를 놓쳤다. 그 결과 시가총액 기준 세계 10대 IT 기업 리스트에서 일본 기업은 1990년 8개에 달했지만 2000년 이후에는 모두 사라졌다.

일본과 독일의 이런 차이는 국가 경제력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그 차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에서 차지하는 GDP 비중에서 드러난다. 일본은 2000년 14.6%에서 2018년 5.8%로 쪼그라들었고, 독일은 5.8%에서 4.7%로 낮아졌다. 이에 따라 같은 기간 중 독일 경제 규모는 일본의 40% 수준에서 80%로 증가했다.

한국은 외환위기 때의 구조조정이 2000년대 투자를 촉진하고 시장의 효율성을 높였다. 기업·금융·노동·공공 4대 부문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고통스러웠지만 그 과실을 2000년대 중반 이후 거뒀다. 특히 대기업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원화 약세에 힘입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 결과 경제 규모가 1990년 일본의 9% 수준에서 지금은 35%까지 성장했다. 앞으로도 경제가 구조조정을 통해 효율화됐을 때 통화 약세 효과가 극대화됨을 명심해야 한다.

성장 분야에 과감한 투자 필요

한국을 저성장에서 탈출시킬 세 번째 요소는 기술투자다. 투자에 성장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거품경제 붕괴 이후 엔고(高)와 내수경기 침체로 기업의 투자 활력이 크게 떨어졌다. 수출과 투자를 통해 경기회복의 시동을 건 것은 아베 정부 출범 이후였다. 반면에 한국은 2000년 초반의 기술투자가 산업구조 변화 대응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국내 산업 지형도가 크게 변했다. 1999년 말 기준 거래소 시가총액 10위를 보면 1위 한국전력, 2위 KT, 3위 삼성전자, 4위 포스코였고 은행 3개가 들어가 있었다. 이에 비해 2019년 현재 1위 삼성전자, 2위 SK하이닉스로 그 뒤에 4위 네이버, 5위 현대차, 6위 삼성바이오로직스, 8위 셀트리온이다.

한국의 GDP 대비 설비투자는 2000년 초반 10% 수준에서 지금은 8% 밑으로 떨어졌다. 무엇보다 방향성이 문제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이라는 기치 아래 기존 산업에 인공지능(AI)을 탑재하고, 일본은 로봇과 헬스케어, 중국은 로봇과 바이오, 미국은 플랫폼 비즈니스로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한국은 방향이 뚜렷하지 않다. 모빌리티 사업조차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처지에 빠져 있다.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기술추격 국가가 기술 선진국을 앞설 기회를 갖는다. 이는 마치 F1 자동차 경주에서 상대방을 추월하는 계기가 코너를 돌 때인 것과 마찬가지다. 코너에서 뒤처지면 직선 코스에서 따라잡기 어렵다. 기술 패러다임 변화 시기에는 성장 분야에 과잉이다 싶을 정도의 투자와 함께 올바른 전략이 병행돼야 하는 이유다.

물체가 지구 중력을 벗어나려면 시속 4만km 이상 추진력을 내야 한다. 한국경제는 깊디깊은 장기 저성장에 접어들었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소소한 정책으로는 힘들다. 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의 경험에 있다. 1990년대 이후 성장을 이끌었던 통화 약세·구조조정·기술투자, 이 세 가지가 돌파구다. 무엇보다 독일처럼 과감한 성장 전략을 롤 모델로 하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

해외 투자로 돈의 물꼬 돌려야 원화 약세 촉진

2000년부터 올해 10월까지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 누적액은 7800억 달러(900조원)에 이른다. 해외 돈이 국내로 많이 들어오면서다. 국내도 1인당 GDP가 계속 증가해 3만 달러를 넘고 노후를 대비한 저축이 증가하면서 자본이 축적되고 있다. 이 돈이 지금 부동산으로 흐르고 있다. 자칫하면 일본의 1990년대처럼 자산가격 버블로 후유증을 겪을 수 있다. 돈의 물꼬를 적극적으로 해외로 터야 한다. 해외로 돈이 나가면 통화 약세를 유도해 수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외환보유액이 4000억 달러, 국민연금 해외자산이 240조원(총자산대비 34%)에 이를 정도로 공공부문은 해외자산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부문은 여전히 국내자산에 머문다. 그러다 보니 대외금융자산 보유액은 GDP 대비 88%로 선진국(258.6%)에 비해 낮고 신흥국과 비슷하다.

금융기관 총자산 대비 해외자산 비중도 7%에 그친다. 물론 해외자산 비중을 늘릴 때 리스크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최근 해외금리연계 파생상품(DLF) 사태처럼 리스크를 잘 살피지 않으면 오히려 낭패를 볼 수 있다.

해외자산을 늘려서 수익성을 높이면 미래세대가 그 과실을 향유할 수 있다. 오일·가스 수출로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가 8%에 이르는 노르웨이는 국부펀드 규모가 1000조원에 달한다. 이중 해외주식 비중이 70%다. 1인당 1억4000만원의 해외주식을 보유한 셈이다. 해외로 자본을 수출하면 부동산 버블까지 완화할 수 있으니 미래세대의 소득을 위한 다목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김경록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래에셋자산운용 경영관리부문 대표를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