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청와대 정치’ 지령 내리듯 집값 잡겠다고 나섰지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67호 27면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정부가 천장 모르고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을 통제하려는 단호한 조처를 취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고가 주택의 구매에 은행 융자를 금하고, 주택과 아파트의 보유세를 크게 인상하고, 거기에 더하여 소위 다주택 보유를 어렵게 하려고 하는 조처들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정부의 규제에 관계없이 주택이나 아파트 가격이 계속 상승한다는 사실이다. 시장경제에서 상품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공급과 수요의 균형 관계이다. 그런데, 오늘의 부동산 가격 상승에 이러한 기초적인 경제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가?

부동산 가격 급등, 투기 탓 크지만 #다주택이 수탈·착취만은 아닐 것 #명령·모토 앞세우는 운동권 정치 #이젠 열린 의회 정치로 가야할 때

의식주(衣食住)는 예로부터 삶의 기본적인 요건으로 간주되어 왔다. 생명유지를 위하여 음식을 취하고, 추위에 견디기 위하여 적절한 옷을 입고 하는 일이 필수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옷을 두고 말하면, 옷을 입는 동기가 춥고 더운 것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옷은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다. 옷을 입는 것, 특히 가려서 입는 것은, 사회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요구에 답하는 것이고, 거기에는 사회적 과시(誇示)의 목적도 있고, 이러한 것들에 관계하여 확인되는 자존감의 유지에 관계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의식주의 요구 가운데에도 가장 기본이 되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갖는다는 것을 넘어 편안하게 자리할 수 있는 곳을 갖는다는 것은 생물의, 특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조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또는 생물체는, 거점(據點)을 분명히 한 다음에야 먹이도 구하고 옷을 단장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주택에 대한 수요는 참으로 생명체로서의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필요이다.

지금 주택 가격 수요·공급 원리에 안 맞아

그런데 이러한 주택의 필요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요에 공급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인가? 그리하여 집값이 오르고 또 오르는 것인가? 여러 통계에 의하면, 서울과 근교의 주택 대 가구(家口)의 비율은 2017 년을 기점으로 하여 96% 정도가 되고,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보면 110%가 넘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집값이 오르고 비싼 것은 반드시 수요 공급이 서로 맞아들어가지 않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집을 새로 사고 옮기는 데에는 보다 넓고 좋은 집으로 가자는 동기가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의 평균 주택 가격이 수요 공급의 원리에 맞아 들어간다고 할 수는 없다.

많은 부동산 매매의 동기는 투기이다. 서울과 세종시의 다주택 보유 공직자들에게 여분의 주택을 처분하라는 명령이 내렸다고 하는데, 세종시의 소유 주택의 매매에 따르는 이익금이 1억7000만원이 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보다 더 큰 수익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 것은 물론이다. 거대한 수익금은 부동산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기업체, 특히 새로 시도한 창업에 따라붙는 것으로 대중 매체에 보도된다. 투자하면 거대한 이익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한국 경제에서 관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에 비슷하게 패가망신하게 되는 실패의 경우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어느 논평가는 한국의 자본주의를 ‘카지노 자본주의’, ‘도박 자본주의’라고 이름한 일이 있다.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대박’과 같은 유행어도 시대의 풍조를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자본주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에 비슷한 다른 말로 ‘임대인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일정한 자산, 물리적·정신적 자산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여, 수익을 얻으려는 경제 장치를 비치하고 있는 경제를 말한다. 이러한 이익의 추구만으로 경제가 성립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수익의 추구가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특징이 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임대 추구는 여러 가지로 행해질 수 있다. 옛날 어떤 영주(領主)는 강물 위에 쇠줄을 쳐서 왕래를 제한하고 통과료를 받았다고 한다. 간단하게 말하여, 어떤 사업을 하려면 허가증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그에 비슷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세입을 증대하려는 국가적 시도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제일 잘 알려진 임대제도는 영주나 지주가 받아내는 지대(地代)에서 찾을 수 있다. 농토를 빌려주고, 그 대가를 실물로 또는 돈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는 지배계급에 속하는 소유주가 재산을 쌓고, 안일(安逸)의 시간 또는 유탕(遊蕩)한 시간을 보낼 여유를 확보하는 방편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유유자적(悠悠自適)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유의 시간이 사회적으로 누적되고 선용이 될 때, 문화와 교양 그리고 정신적 심화의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된다.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지대에 비슷한 것이 자신이 소유하는 집이나 집의 일부를 임대에 내놓고 받는 임대료이다. 이것은 유한인(有閑人)에게 그 수입을 늘려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 유한인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정년퇴직이나 실직으로 하여 그렇게 된 사람이기도 하다. 퇴직연금이 충분치 못한 사람의 경우, 퇴직 이전에 집을 사두었다가 세를 받는 것은 생활 또는 생존의 방편을 찾는 일이 된다. 그것은 단순한 수탈이나 착취 행위라고 정의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사회 제도의 미비 또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가족제도의 미비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생각하여야 할 것은, 세를 들어 산다는 것이 수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주택 임대 수준이 턱없이 높거나 기복이 심한 것이 아니라면, 은행 대부를 얻어 집을 사는 것이나 집세를 내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월세는 절차가 간편하다는 이점이 있을 수 있다. 다른 나라의 대학도시들에서 사회에 정착하려는 젊은이들이, 젊은 교수들을 포함하여, 집을 사야한다는 강박을 갖지 않고 오랫동안 셋집을 빌려 사는 것을 나는 드물지 않게 보았다. 이런 것을 참작하면, 다주택 소유가 반드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 안정에 기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그것은 예비적으로 주택의 수요 공급의 균형을 계획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부동산 대책 필요하지만 너무 근시안적

이런 것으로 미루어 주택 소유의 문제도 포함한 많은 것은 사회의 제도, 지배적인 가치관, 그리고 관습과 문화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주택의 수요 공급이 그렇게 균형을 갖추지 못한 것도 아닌데, 우리 사회에서는 주택과 주택 가격의 문제가 사회와 정치를 흔들어 놓는 문제가 된다. 다주택소유자가 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소박한 동기는 일정한 돈을 저금한 사람이 인플레가 심하고 믿을 수 없는 미래의 경제상황에 대하여, 믿을 수 있는 자산을 확보하는 마음일 것이다. 또는 위에서 비친 바와 같이 도박 자본주의 하에서 대박을 노리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경제의 압축 성장 속에서 도박적 사고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도 당분간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부동산과 관련된 논평이나 정부의 대책이 너무 근시안적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사회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접근과 이해가 단편적이라는 것이 지금의 인상이다. 문제를 넓은 맥락과 관점에서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정부가 민주화 정치운동으로부터 제도적 민주주의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최장집 교수는 이러한 이행의 문제를 얼마 전 ‘김대중학술회의’에서 면밀하게 검토하고 설명한 바 있다(12월 9일 김대중도서관 컨벤션홀 강연). 정치 운동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결사(結社)를 요구한다. 그렇게 맺어진 동지들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도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정치는 정당이나 의회에서 열리지 않고, 캠프와 진영의 정치가 된다. 물론 정책도 그 연결망을 통하여 집행된다. 생각이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청와대 정치’라는 말은 이런 사연으로 설명된다.

운동을 위한 정치 결사는 이데올로기적 이념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념적 정형화 속에서 생활 세계의 크고 작은 사실들이 수용된다. 이것은 특히 진보주의 운동권 정치에서 그러하다. 오늘날 한국의 진보가 반드시 그 안에 드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념적 현실주의의 전형은 정치화된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이라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삶의 물질적 조건을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화는 관념을 현실에 대체한다는 의미에서, 유심론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운동이 되고 권력이 될 때, 구태어 이름을 붙이자면, 유명론(唯命論) 또는 지령주의(指令主義), 즉 결사체의 위계 속에서 전달되는 명령이나 지령이 지시하는 체계가 된다. 대체로는 자기 정당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좁은 결사체에서 유통되는 이념과 사고는 명령, 슬로건, 모토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러한 변화를 예견하고 마르크스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오늘의 정치 담론과 정책이 단편화된 현실만을 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정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최장집 교수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운동권 정치의 좁은 시각은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최장집 교수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다양한 의견에 열려 있는 진정한 정당 정치, 의회 정치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현실을 전체적으로 살피고, 그 다양한 모습을 검토하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적 문화, 즉 정치에 몰입되지 않고 그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독자적 지적 문화가 존재하여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여기에서 간단히 논의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