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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사랑꾼과 예쁜 밀당녀…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12)  

예전에 영화 ‘건축학개론’에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자막이 흐르더군요. 그때 여러분은 어떤 추억이 기억나셨나요? 혹시 고개를 끄덕이며 젊은 날의 첫사랑을 떠올리셨나요? 내가 사랑했던 그, 또는 나를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을요.

그 아련한 추억 중에 아쉬움이 있다면, 내가 사랑한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것 아닐까요? 애태우며 밤잠을 설치고 사랑했건만 내게 냉랭하던 그 사람을 변하게 할, 바로 ‘사랑의 묘약’같은 것 말이에요.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은 바로 내가 사랑한 사람도 나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묘약에 관한 오페라랍니다. 순수한 시골청년 네모리노가 하얗고 긴 손가락의 매력적인 지주 딸 아디나를 사랑하는데, 외부인사인 약장수와 군인이 끼어들어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고 나서야 사랑이 완성된다는 내용의 러브스토리로,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입니다.

막이 열리자마자 네모리노는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디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푹 빠져 있습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책에 나오는 ‘사랑의 묘약’에 대한 내용이랍니다.

마을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디나. [사진 Flickr]

마을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디나. [사진 Flickr]

갑자기 북소리가 들리더니 군대가 오고, 지휘관 벨코레는 아디나에게 꽃을 바치며 청혼을 합니다. 좀 엉뚱하지요? 첫만남에 청혼이라니요. 그런데 문제는 아디나예요. 제복 입은 남자를 좋아하는지, 이런 상황을 즐기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그녀를 사랑하는 네모리노에게는 충격입니다.
안절부절해진 네모리노는 결국 아디나에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만 그녀는 완곡히 거절합니다.

“산들바람에게 물어봐요, 어째서 쉴새 없이 이 꽃 저 꽃을 다니는지.
바람이 이야기 하겠지. 그렇게 변덕스런 것이 여자라고.
날 단념하고 다른 사랑을 찾아요”
라며 아픈 숙부에게나 가보라 합니다. 이에 네모리노는

“흘러가는 강물에게 물어봐요 왜 바다를 향해 가는지.
자기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가는 것이라 하겠지요.
내 마음도 너에게만 흘러가는걸.
난 당신 생각 뿐”

이라며 응수하는데, 비유가 참 멋지지요? 이들의 2중창 ’산들바람에게 물어봐요’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이 있기에 행복하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의 강물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네요.

풍악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번쩍거리는 마차를 타고 약장수 둘카마라가 등장하여 소위 만병통치약을 능수능란하게 팝니다. 네모리노는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가 소설에 나오는 사랑의 묘약도 있냐고 묻습니다. 눈치 빠른 약장수는 네모리노의 어수룩함을 눈치채지요. 묘약이라며 싸구려 와인을 내놓고선, 약의 효험은 하루가 지나야 나타난다고 사기를 친답니다. 도망갈 시간을 벌려는 농간인지도 모르고, 네모리노는 가진 돈 전부를 주고 기쁘게 삽니다.

네모리노는 묘약 한 병을 단숨에 마십니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자기에게 넘어올 아디나를 상상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는 아디나를 보고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답니다. 갑자기 그의 태도가 바뀌자 아디나의 마음이 좀 상했겠지요? 그 때 벨코레가 나타나 내일 급히 부대이동을 해야 하니 오늘밤에 결혼하자는 제안을 하는데, 마음상한 아디나가 덥석 그러자고 하네요.

이거 큰일 났습니다. 약효가 나타나기까지는 하루가 지나야 되는데, 오늘 결혼한다니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입니다. 네모리노는 절박한 마음으로 제발 오늘만은 안된다고 합니다. 벨코레는 당장 꺼지라고 그를 구박하고, 아디나는 자기를 너무 사랑하다가 이상해진 것 같으니 용서하라고 합니다. 결국 약장수를 찾으며 도와달라고 외치는데, 관객에겐 그 모습이 한없이 웃프게 느껴집니다.

‘사랑의 묘약’ 한 병을 더 사야 하는데 돈이 없는 네모리노. [사진 Flickr]

‘사랑의 묘약’ 한 병을 더 사야 하는데 돈이 없는 네모리노. [사진 Flickr]

약장수는 한 병을 더 먹어야 당장 효과가 나타난다고 하지만 이미 네모리노는 돈을 다 써버렸는걸요. 벨코레가 나타나 군대 입대하면 당장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아디나 옆에 계속 얼쩡거리는 이 녀석을 제거하고 싶었던 게지요. 네모리노는 묘약을 살 수 있는 돈을 준다는 말에 입대원서에 덥석 서명을 해버립니다. 아, 불쌍한 네모리노….

그런데 묘한 반전이 있답니다. 마을 처녀들이 수근대기를, 네모리노의 숙부가 사망했는데 엄청난 유산을 그에게 남겼다는 거에요. 이 때 가짜 묘약을 더 마신 네모리노가 나타나자, 마을 처녀들이 몰려들어 온갖 추파를 던지며 네모리노의 환심을 사려합니다. “야호!” 숙부 소식을 모르는 네모리노는 드디어 묘약의 효력이 나타난다며 기뻐합니다.

아다나와 둘카마라도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는데, 둘카마라는 그녀에게 그간의 사정을 알려줍니다. 아디나는 자신때문에 그가 자유를 팔고 군대에 입대했다는 이야기에 감동하고 벨코레에게서 입대원서를 찾아옵니다.
그사이에 네모리노는 자기를 에워싼 여자들 때문에 아디나가 속상해서 눈물을 흘렸다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그 유명한 아리아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을 부른답니다.

아디나가 입대원서를 네모리노에게 돌려주며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네모리노는 그녀의 고백을 기다리지요. 허나, 그녀가 말없이 집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는 낙담하여 소리칩니다. “네 사랑이 없다면 이거 필요 없어, 그냥 군대에 들어가 죽겠어! 내 인생은 계속 슬플테니까….” 그의 절절한 사랑을 확인한 아디나도 결국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격정적으로 포옹한답니다. 그 광경을 보는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면서 같이 눈물 흘리고,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혹시나 아디나가 네모리노의 상속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시시콜콜 따지지 말기로 해요. 추운 겨울날, 그저 우리는 순수한 사랑꾼 네모리노와 예쁜 밀당녀 아디나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답니다.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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