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군 ‘이부제부’ 전략…중국군 포로 1만4000명 대륙행 거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66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6>

연합군은 지원군 포로 2만여 명을 구금했다. 제주도로 이송되기 위해 거제도를 떠나는 지원군 반공포로들. [사진 김명호]

연합군은 지원군 포로 2만여 명을 구금했다. 제주도로 이송되기 위해 거제도를 떠나는 지원군 반공포로들. [사진 김명호]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포로송환의 막이 올랐다. 중국지원군 포로는 약 2만2000명, 미군 포로의 7배를 웃돌았다. 지원군전사(戰士)에서 포로가 되기까지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중국지원군 포로 미군 포로의 7배 #미군, 국민당 군 장교 출신 훈련시켜 #수용소 관리관 임명, 친공포로 회유 #귀국 택한 6000명 개성선 영웅 대접 #중국 돌아가자 상상도 못 한 날벼락

중국 군사전문가의 분석을 소개한다. “7000명 정도는 환자와 부상병이었다. 탄약과 양식이 떨어지고, 추위와 기아로 전투력을 상실해 포로가 된 경우가 제일 많았다. 1만 2000명에 조금 못 미쳤다. 자발적으로 투항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수백 명에 불과했다. 자질구래 한 원인도 1000명 정도는 됐다.” 포로들은 별꼴을 다 겪었다.

1951년 7월, 정전협상이 시작됐다. 미군은 포로에 신경을 썼다. 전방 포로수용소에 있던 지원군 포로들을 거제도에 일괄 수용했다.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감독과 관리만 철저히 했다. 정전협상은 포로송환 문제가 중요한 의제였다. 양측이 팽팽히 맞섰다. 강대국에게 협정이나 조약은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은 제네바협정을 무시해버렸다.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자며 자유송환을 주장했다. 포로정책도 바꿨다. 이부제부(以俘制俘), 포로를 이용해 포로를 제압했다. 반공포로를 지지하고, 친공포로 속에 첩자를 침투시켰다. 자유 송환된 포로들을 대만의 국민당 군에 편입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죽어도 대만 가서 죽겠다” 혈서 난무

정전협상에서 황화(왼쪽 셋째)는 포로 송환 문제를 전담했다. 1971년 7월 9일 예젠잉(왼쪽 둘째)과 함께 중국을 비밀 방문한 키신저를 베이징공항에서 영접하는 황화. [사진 김명호]

정전협상에서 황화(왼쪽 셋째)는 포로 송환 문제를 전담했다. 1971년 7월 9일 예젠잉(왼쪽 둘째)과 함께 중국을 비밀 방문한 키신저를 베이징공항에서 영접하는 황화. [사진 김명호]

지원군 포로 중에는 국·공전쟁 시절 국민당 군에 포로가 됐다가 중국인민해방군으로 편입된 사병이 많았다. 중공이 선전하는 “견고한 사상으로 무장된 지원군 전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군은 국민당 군 장교 출신 포로들 중 쓸 만한 장교들을 선발해서 도쿄로 보냈다. 특수훈련 시킨 후 포로수용소 관리관으로 임명했다. 관리관들이 요구한 국민당지부와 반공항소동맹회(反共抗蘇同盟會) 설립도 허락해 줬다. 두 단체는 정치운동을 벌렸다.

중공당원과 공산주의 청년단 단원을 색출해서 탈당과 탈단서에 서명을 요구했다. 미군이 지원한 초콜릿, 캐러멜, 누드 화보, 담배 등으로 회유하고, 거부하면 몰매를 퍼부었다. 효과가 있었다. 죽어도 대만에 가서 죽겠다는 혈서가 난무했다. 팔뚝과 등에 문신하는 포로들이 늘어났다. ‘반공(反共)’이나 ‘살주발모(殺朱拔毛)’, 중군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을 죽여버리고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을 없애 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지원군 포로 1만4000명이 대륙행을 거부했다. 미군은 이들을 거제도에서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1953년 7월 27일 오후 거제도에 남아있던 지원군 포로들은 만세를 불렀다. 거제도에서 포로 시절 보낸 장쩌스(張澤石·장택석)의 회고록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미군 대위가 정전협정이 체결됐다고 알려줬다. 다들 환호했다. 미군들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는 죽이는 경쟁 하지 말자며 서로 얼싸안았다. 하루빨리 처량한 섬에서 벗어나 처자와 자녀들 곁에 가기를 희망한다며 우리를 위로해 줬다. 조선 전우들과도 기쁨을 함께했다. 여자 수용소에 노래 잘하는 조선인민군 포로가 있었다. 예쁜 얼굴에 두 눈은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날도 노래를 불렀다.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노래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들 땅을 치며 통곡했다.”

전쟁과 정전협상을 분담했던 펑더화이(왼쪽)와 리커농(오른쪽). 1953년 7월 28일, 개성. [사진 김명호]

전쟁과 정전협상을 분담했던 펑더화이(왼쪽)와 리커농(오른쪽). 1953년 7월 28일, 개성. [사진 김명호]

8월 5일에 시작된 지원군과 미군의 포로 교환은 9월 6일까지 33일이 걸렸다. 다시 장쩌스의 생생한 기록을 소개한다. “1000여 명의 인민군 포로와 함께 거대한 미군 함정 타고 거제도를 떠났다. 인천에서 문산까지 열차로 이동했다. 처음 보는 조선의 도시와 농촌이었다. 전쟁의 흔적은 참혹했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났다. 전쟁터에서 포성과 함께 치솟던 화염과는 천양지차였다. 달리는 열차 밖에서 수척한 한국인들이 손을 흔들었다. 인민군 포로들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고, 우리는 동방홍(東方紅)과 지원군전가(志願軍戰歌)를 열창했다. 밤늦게 문산에 도착했다. 미군은 우리를 창고를 개조한 수용소에 집어넣고 밖에서 문을 닫아걸었다. 이튿날 아침 미군 장교와 민간 복장을 한 대여섯 명이 수용소에 나타났다. 중국 옷 입은 한 50대 초반의 남자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장쩌스는 그날의 묘한 분위기를 평생 잊지 못했다. “나는 중국 적십자를 대표해서 여러분을 위로하러 왔다. 지난 수년간 조국은 여러분의 고난을 주시하며 영웅적인 투쟁을 이해하느라 노력했다. 하루빨리귀향시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오늘 여러분은 판문점을 거쳐 조국으로 돌아간다.” 박수와 만세가 그치지 않았지만 찜찜한 열변이었다.

지원군 포로들은 벽동 외국인 포로수용소에 있던 미군 포로 20여 명과 영국군 포로 1명과 함께 귀국 열차에 올랐다. 중국은 통일전선에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했다.

미·영국군 포로 20여 명 중국으로 갔지만 …

포로 신분에서 벗어나 지원군 지역으로 달려가는 지원군 포로들. 1953년 9월 개성. [사진 김명호]

포로 신분에서 벗어나 지원군 지역으로 달려가는 지원군 포로들. 1953년 9월 개성. [사진 김명호]

미군 포로들도 수용소에서 중국인과 접하며 중국에 매료됐다고 싱글벙글했지만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미국은 매카시주의라는 유령이 미 전역을 휩쓸 때였다. 5332명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교수대에 올랐고, 6만2351명이 2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을 정도였다. 미군 포로들의 중국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자 고향 생각에 온몸이 뒤틀렸다. 일부는 갖은 경로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주위의 시선은 예전과 달랐다. 밀고자, 반도, 적과 내통했다는 꼬리표가 죽는 날까지 붙어 다녔다. 툭하면 체포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감시와 심문도 그치지 않았다. 친인척과 친구들에게 냉대받으며 점점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9월 6일, 중국 측에 넘겨진 지원군 포로 6000여 명은 개성에 있는 지원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빈혈, 위장병, 기관지염, 관절염 등 멀쩡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좋은 치료와 영양가 풍부한 음식 먹으며 원기를 회복했다. 비싼 돈 줘야 볼 수 있는 유명 연예인들의 위문공연이 줄을 이었다.

귀환 포로들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판문점 담판에서 포로송환을 전담하던 황화(黃華·황화)의 연설은 생동감이 넘쳤다. 국내외 정세 들으며 2년간 장님이나 다름없었던 시야가 훤해지는 것 같았다.

1954년 1월 포로들은 귀국 열차에 올랐다. 날벼락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