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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옥살이, 경찰의 극단선택···끝나지 않은 '이춘재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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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56·수감 중)발 논란과 충격이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이춘재는 1980~1990년대 경기도 화성군(현재는 화성시)을 공포로 물들인 10건의 연쇄살인을 저지른 인물이다. 처제 살인 사건으로 수감된 1994년까지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해 전국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JTBC 9월30일 뉴스룸에서 보도한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JTBC 9월30일 뉴스룸에서 보도한 재소자 신분카드에 부착된 이춘재.[JTBC 캡처]

경찰은 최근 이춘재를 14건의 살인과 9건의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피의자로 입건했다. 또 이 사건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부르기로 했다.
특히 이춘재가 저지른 범행 중에서도 8차 살인 사건은 과거 엉뚱한 시민이 범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분을 샀다. 이 남성은 현재 수원지법에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 상태다. 하지만 검찰과 경찰이 당시 이 남성을 범인으로 낙인찍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감정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데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관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연일 주목받고 있다.

8차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오전 화성군 태안읍의 한 가정집에서 중학생 A양(만 13세)이 숨진 채 발견됐다. 7차 연쇄살인 사건 발생 11일 만이었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기존 연쇄살인 사건의 모방범죄로 봤다. 야산과 논길 등 야외에서 발생한 다른 사건과 달리 A양이 집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연쇄살인 사건으로 묶어 수사했다.

8차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A양의 집 [중앙포토]

8차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A양의 집 [중앙포토]

10개월 뒤인 1989년 7월 25일. 경찰은 농기계 수리공 윤모(52· 당시 22세)씨를 A양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연행해 조사했다. 3일 뒤 윤씨에 대한 구속영장도 발부된다. 그해 10월 윤씨는 수원지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윤씨는 20여년을 복역하다 2009년 가석방됐다.
하지만 올해 9월 DNA 분석으로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이춘재로 특정됐다. 이춘재는 경찰 조사에서 "이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했다.

억울한 옥살이 

이춘재의 자백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윤씨가 "나는 무죄다"고 주장해 왔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과거 1심 재판부에선 혐의를 인정했지만 2심에선 "경찰의 가혹 행위 등으로 거짓 자백을 했다"고 항소했다. 하지만 2·3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윤씨는 2003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주장했었다.

8차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모(52)씨가 지난 20일 충북 청주시 운천동 NGO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8차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모(52)씨가 지난 20일 충북 청주시 운천동 NGO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최종권 기자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 수사본부는 재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과거 윤씨를 수사한 경찰들은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감정 결과를 믿고 수사를 했다"며 "윤씨를 검찰에 송치한 뒤 최 형사(사망)가 '윤씨를 한두 대 때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가혹 행위에 대해 부인했다.
당시 수사를 지휘한 검사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부인했다. 경찰은 당시 수사과장과 형사계장 등 경찰관 7명과 당당 검사 1명 등 8명을 직권남용 체포·감금 등 혐의로 입건했다.
윤씨는 지난달 13일 수원지법에 이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서를 제출한 상태다. 그는 재심청구를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직접 써 온 편지를 읽으며 "나는 무죄다"고 외쳤다.

화성 8차 사건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화성 8차 사건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수사권 논란으로 번진 검·경의 자존심 싸움

8차 사건은 검·경의 신경전으로 번졌다. 발단은 지난 11일 수원지검이 "이 사건을 직접 수사하겠다"고 밝히면서다. 검찰은 "윤씨 측이 '검찰이 직접 수사해 진실 규명을 해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며 형사6부(전준철 부장검사)를 전담수사팀으로 구성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조사를 이유로 부산교도소에 수감된 이춘재를 수원구치소로 옮겼다.
검찰은 "이르면 다음 주 초 법원에 재심의견서를 낼 예정인데 의견서를 쓰기 위해 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수원고등검찰청 수원지방검찰청. [사진 연합뉴스TV 제공]

수원고등검찰청 수원지방검찰청. [사진 연합뉴스TV 제공]

하지만 검찰이 이춘재를 수원구치소로 이감하면서 경찰에 알리지 않아 경찰관들이 부산교도소로 헛걸음해야 했다. 이후 검찰이 '과거 윤씨의 체모 감정 결과를 국과수가 조작했다"고 발표하면서 경찰은 '중계수사'라고 지적했다.
이를 놓고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 갈등의 연장선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검·경은 각각 "이번 사건과 수사권 조정은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조작 VS 오류, 국과수 감정서

검찰과 경찰이 치열하게 대립한 부분은 당시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국과수의 감정서다. 과거 경찰은 8차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모 10점을 수거해 국과수에 분석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1989년 1월 범인의 체모 2점을 원자력연구원에 보내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체모 등에 중금속 성분을 분석하는 기법)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원자력연구원의 검사 결과를 다른 용의자들의 체모 분석결과 등과 대조해 윤씨를 범인으로 봤다. 경찰은 이 결과를 토대로 윤씨를 검거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뉴스1]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뉴스1]

검찰은 이 감정서가 고의성이 담긴 '조작'이라고 봤다. 당시 원자력연구원이 진행한 5차례 분석 중 1차 분석만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고, 2~5차 분석은 장비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일반인의 체모를 표준시료(Standard·테스트용)로 분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감정 결과 수치도 가공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경찰은 감정서 작성에 '오류'가 있다고 밝혔다. "국과수 감정인이 자신의 연구결과를 법 과학 분야에 도입해 감정하는 과정에서 시료 분석 결괏값을 인위적으로 조합·첨삭·가공·배제해 감정상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지난 달 13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서에서 8차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한 윤모씨(52)가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지난 달 13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서에서 8차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한 윤모씨(52)가 재심청구서를 제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표준시료라면 옆에 '인증방법' '인증값' '상대오차' 등이 기재돼 있어야 하는데 이런 표기가 없고 1㎎, 10㎎ 등 정형화된 수치가 아닌 0.467㎎의 체모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원자력연구원 보고서 등에도 "일반인의 체모를 사전에 분석해 기기 성능을 테스트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두 기관은 서로의 입장을 반박하고 재반박하며 대립했다. 19일에는 직접 만나 논의했다. 하지만 뚜렷한 입장차만 재확인하고 자리를 파했다.

사건 수사 경찰 사망

검·경 갈등 속에 비보도 전해졌다. 8차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A경위가 19일 오전 9시20분쯤 경기도 수원시의 한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경찰관은 윤씨가 재심청구 기자회견에서 실명을 거론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던 인물이다. 현장에서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범죄 혐의점도 없어 경찰은 A경위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A경위의 사망 원인과 이춘재 사건 수사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설명했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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