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딴따라 송해, 끝나지 않는 노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70년이 흘러가도 돌아갈 수 없구나~ 세월아 가지 말고 거기 섯거라.’

92세 최고령 음반 신기록 #북녘 고향에 가고픈 마음 #차별·구분 없는 세상 꿈꿔 #스산한 세밑 달래주는 듯

올 아흔둘인 국민MC 송해가 지난달 발표한 새 노래 ‘내 고향 갈 때까지’의 일부다. 송씨는 지난해 7월 내놓은 앨범 ‘딴따라’에 이어 자신의 국내 최고령 음반 취입 기록을 다시 썼다. 노래를 들어봤다.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다. 송씨는 나이를 잊은 듯 한 마디 한 마디 구성진 가락을 풀어놓는다. 가사는 평이하고 리듬도 화려하지 않지만 듣는 이를 아련한 그곳으로 이끌어간다.

‘내 고향 갈 때까지’는 1987년 선보인 송해의 데뷔곡 ‘망향가’와 대구(對句)를 이룬다. 이른바 ‘38따라지’ 세대인 송씨는 고향(황해도 재령)을 떠난 아픔과 그곳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목메어 운다. ‘고향은 먼데 찬바람 불어오면 폭풍이 몰아치면 마음도 업니다.’ 코미디언·사회자로 주로 활동하고, 또 남의 히트곡만 불러온 송씨가 정식 가수로 일어선 순간이었다. 송씨는 그해 ‘백마야 우지 마라’ ‘애수의 소야곡’ 등 1세대 대중가요를 모아 ‘송해 옛 노래 1집’ 음반을 생애 처음으로 냈다. 만 60세 때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과 동의어다. 그가 없는 ‘전국노래자랑’은 상상하기 어렵다. 88년 첫 마이크를 잡은 이후 지금까지 32년째 방방곡곡을 돌며 동네 명물들이 맘껏 끼를 발산하도록 했다. 코흘리개 꼬맹이부터 머리 성성한 할아버지까지, 학교 못 다닌 촌부부터 박사 학위 빛나는 교수까지 그 앞에선 누구나 무장해제가 됐다. 남녀·재산·직업·신분을 뛰어넘는 한바탕 무대가 차려졌다. 출연자가 누구든, 그들의 몸과 마음에 자신을 맞추는 송씨의 진행 솜씨 덕분이다.

한국 연예계의 산증인 송해. 1950년 황해도 고향을 떠나 서해 바닷길을 따라 피난을 내려오면서 본명 송복희를 잊고 송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중앙포토]

한국 연예계의 산증인 송해. 1950년 황해도 고향을 떠나 서해 바닷길을 따라 피난을 내려오면서 본명 송복희를 잊고 송해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다. [중앙포토]

송해 하면 예능프로 MC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그의 출발점은 가수다. 어려서부터 흥얼대기를 좋아한 그는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황해도 해주음악전문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당시 북한에 있던 유일한 음악학교로,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양성학교다. 현란한 기교보다 배에서 우러나오는 통목소리가 특징인 그는 그때 노래의 기초를 닦았다. 1950년 12월 혈혈단신 부산에 내려와 국군 통신병으로 복무했고, 3군 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반면 ‘가수’ 송해는 더 이상 도드라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전역 후 55년 창공악극단에 들어가며 만능 엔터테이너 길을 걷었다. 유랑극단 생활을 하며 연기·사회·노래 세 가지를 병행했다. 단원 중 누구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를 채워야 했다. 지금도 옛 대중가요 수백 곡을 암기해 부르는, 노래방에 버금가는 레퍼토리를 갖췄지만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곡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서울 종로 송해길에 있는 노래비.

서울 종로 송해길에 있는 노래비.

하지만 어떤가. 대신 우리는 ‘전국노래자랑’의 송해를 얻게 됐다. 4년 전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를 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오민석씨는 “노래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의 인생 3할은 노래였다”고 말한다. 아니, 어쩌면 10할이 노래일지도 모른다. 노래자랑 무대에 오른 풋내기 가수, 그들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 관객을 아우르는 그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가 고단한 세상을 웃음으로 넘기는 큰 노래일 수 있다.

오씨는 송해의 가장 큰 재산으로 사람을 꼽는다. 송해만한 사람 부자가 없을 것으로 본다. 행사장에서 만난 숱한 장삼이사(張三李四)를 말하는 게 아니다. 위·아래 따지지 않는 공평한 마음씨 덕분에 그에게는 안티 팬이 거의 없다. 심지어 구순 할배가 “귀엽다”고 한다. 이산·전쟁·가난 등을 두루 겪으며 터득한 지혜랄까. 분열과 대립이 들끓는 요즘, 차별과 구분을 무너뜨리는 그의 소통 방식이 빛나는 지점이다.

스산한 세밑이다. 아쉬움이 밀려든다. 헤어진 이들도 생각난다. 송해의 숨겨진 일화 하나. 그는 87년 뺑소니 사고로 금쪽같은 아들을 잃었다. 주변에서 가해자를 찾으라고 했지만 그는 추적을 포기했다. “트럭 운전수니 생활이 넉넉하지 않았겠지. 그 사람을 찾으면 그 사람 가족은 무슨 수로 생계를 유지하겠어”라고 했다. 그는 아픔을 딛고 노래자랑 마이크를 잡았다. 아들이 남긴 선물로 여겼다. 지금 어디선가 송씨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 내 곁에 있으니 괜찮아. 이만하면 괜찮아’(‘내 인생 딩동댕’) ‘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한 인생. 나는 나는 딴따라.’(‘딴따라’)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