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왜 안 뜨나" 7년전 文의 안타까움···결국 총리 세웠다

중앙일보

입력 2019.12.19 00:08

업데이트 2019.12.19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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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 1일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아 당시 정세균 국회의장과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 1일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아 당시 정세균 국회의장과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역대 국회의장이 퇴임 후 걸어온 길이다. 첫째, 정계 원로의 길. 황낙주·박관용·임채정·김형오·박희태·강창희 전 의장(이상 재임 순) 등이 이 길을 걸었다.

여권 핵심이 전한 총리 인선 배경
정 후보에 애틋·감사·미안함 가져
혼탁했던 2012년 대선후보 경선
후보 사퇴 안한 정세균에 고마움
측근들 대거 친문 합류 마음의 빚

둘째, 박준규·이만섭·김원기 모델. 퇴임 후 다시 총선에 출마해 선수(選數)를 더했다. 박준규·이만섭 전 의장은 국회의장을 또 했다.

셋째, 이승만(초대의장)·신익희(2대 의장) 모델. 두 사람은 국회의장을 지낸 뒤 대권에 도전했다.

지난해 5월 31일, 막 퇴임한 정세균(69) 전 국회의장을 인터뷰했다. 당시 그에게 “세 가지 길 중 어느 길을 걷고 싶으냐”고 물었다. “제4의 길”이라는 모호한 답이 나왔다.

그 모호한 답변이 현실이 됐다. 그는 국회의장 출신 첫 총리라는, ‘제4의 길’을 향해 가고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 퇴임 뒤 ‘제4의 길’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이낙연 국무총리 후임으로 정세균 후보자를 지명했다. 지명 이유로 ‘경제’와 ‘통합’을 꼽았다. 그것뿐일까. 사실 문 대통령과 정 후보자의 ‘정치적 거리’는 그다지 가깝지 않다는 게 정설이었다. 정 후보자를 ‘범친노’로는 분류해도 ‘친문’이라곤 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여권 핵심 인사인 A씨는 18일 “문 대통령은 정 후보자에 대해 매우 애틋하고 감사하며 미안한 마음 세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총리 지명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거명됐지만 문 대통령은 처음부터 ‘정세균’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왜 정 후보자에게 ‘애틋’ ‘감사’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까. A씨에 따르면 문 대통령과 정 후보자의 결정적 순간이 ‘201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다. 당시 문재인·손학규·정세균·김두관 후보 4명이 경쟁했다.

①애틋함=A씨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경선 도중 참모들에게 “정세균 의원이야말로 콘텐츠도 있고 부드러우며 합리적인 분인데 왜 국민에게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지, 더 안 뜨는지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실력보다 저평가된 우량주’로 정 후보자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A씨는 “경선 때 문 대통령이 경쟁자를 놓고 저렇게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아직 기억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정 후보자의 경우 ‘낮은 지지율’이 화제였다. 정 후보자는 지금의 여권이 2007년 대선(이명박 후보 당선)과 2008년 총선에서 참패(민주당 81석)한 뒤 당 대표를 맡았다. 난파 위기에 몰린 최악의 상황을 수습한 것은 물론 이듬해 2009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해 정국 흐름을 확 반전시켰다. 하지만 그의 대선후보 지지율은 늘 1% 안팎이었다. ‘카리스마와 대중성이 부족하다’ ‘관리형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는 분석이 나오곤 했다.

②고마움=당시 경선 레이스는 혼탁했다. 전국 순회경선 도중 손학규·김두관 후보 측이 한때 경선을 보이콧했다. 당시의 상징적 장면이 청주 합동토론회(2012년 8월 24일)였다. A씨의 회고다. “청주에 갔더니 정세균 후보자만 현장에 있었다. 다른 후보들이 판을 뒤집어 버리고 아예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정 후보자마저 손·김 후보 측에 가세했으면 경선은 ‘깽판’났을 거다. 하지만 정 후보자는 그러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선을 완주한 정동영 의원에게 ‘경선 지킴이’(당시 나머지 후보는 전원사퇴)라는 고마움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문 대통령도 정세균 후보자가 경선을 망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준 것에 고마움을 갖고 있다.”

③미안함=‘미안함’은 정 후보자가 저평가된 이유와 관련이 있다. 정 후보자는 ‘범친노’ 진영의 좌장이었다. 한때 ‘정세균(SK)계’도 구축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자 친노 지지층뿐 아니라 SK계 핵심 인사들이 문 대통령 쪽으로 이동했다. 면면이 화려하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을 지낸 김진표 의원, 문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최재성 의원….

그런데도 정 후보자는 결정적인 순간 문 대통령 쪽에 섰다. 2012년 대선후보 경선 패배 한 달 뒤 정 후보자는 문재인 캠프 총참모장(선거대책위원장)으로 합류했다. ‘관리형’이란 평가에 걸맞게 어수선한 캠프를 다잡았다. 문 대통령의 최측근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은 당시 사석에서 “정세균 의원이 오기 전과 뒤가 놀랍도록 달라지더라”고 말하곤 했다. 이미 당시부터 ‘문재인 후보가 이기면 총리는 정세균’이란 말이 돌아다녔다.

이낙연 독주 구도, 경쟁체제 바뀔 수도

201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경쟁한 이후 정 후보자는 문 대통령과의 정면승부는 피하거나 우회했다. 정 후보자는 2015년 당권 도전을 검토했다. 그러다 문 대통령이 출마 선언을 하자 하차했다. 2017년 대선은 건너뛰었다. 대신 택한 길이 바로 국회의장.

총선을 넉달 앞둔 시기적 특성상 야권의 ‘삼권분립’ 훼손 공세를 뚫고 후보자 꼬리표를 떼는 일이 녹록진 않을 듯하다. 이낙연 총리의 경우 지명 후 표결까지 21일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김종필 전 총리 인준은 한나라당의 반대로 6개월이나 걸렸다. ‘4+1’ 공조를 유지하면 인준 표결 자체야 돌파할 수 있겠지만 ‘4+1’ 공조가 비틀거린다는 점도 변수다.

하지만 청문회와 인준 표결 관문을 넘어선다면 공직자로선 ‘그랜드슬램’ 달성이다. 입법부 수장, 여당 대표(열린우리당 의장)를 지낸 그가 ‘후보자’ 꼬리표를 떼면 이 총리가 독주하는 여권 차기 구도가 경쟁체제로 바뀔 수도 있다. 이번 문 대통령의 선택은 차기 구도까지 내다본 그림일지 모른다.

강민석 정치 에디터 ms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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