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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 사람들이 버린 시간을 나는 살지요"

중앙일보

입력

섬진강시인 김용택 시인이 신작을 펴냈다. 신작은 시와 산문의 경계가 흐릿하다. [사진 중앙포토]

섬진강시인 김용택 시인이 신작을 펴냈다. 신작은 시와 산문의 경계가 흐릿하다. [사진 중앙포토]

'섬진강' 연작시로 유명한 김용택(71) 시인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촌 시인이다. 그는 시골 마을과 자연을 소재로 소박한 감동을 주는 시와 산문을 써왔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에서 꾸준하게 글을 쓰고 있는 그가 최근 신간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좋겠어요』(난다)를 펴냈다. 시골에서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글들이 100여편 담겨 있다.

"잠들기 전에 오늘을 생각해보니, / 무난하였다. / 지나고 나서 대개 다 무난하다, 고 한다. / 만족하여 혼자 웃고 / 눈을, / 아니 이불을 턱까지 끌어다가 / 덮었다." ('지나고 나서 대개 다 무난하다, 고 한다' 중에서)

그런데 수록된 글들은 가만 읽어보면 시인지, 산문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어떻게 보면 시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산문 같기도 하다. 그래선지 김 시인은 책 첫머리에 "시와 산문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왕래하라"는 글을 적어두었다. 경계를 지운 글들은 모나지 않아 순하게 읽힌다. 이메일을 통해 그의 근황과 작품 이야기를 들어봤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주로 강연을 다니지만, 집안 돌보기도 하고 고양이하고 놀기도 하고, 아내의 집안 살림을 맡아 하기도 합니다. 아내가 시키는 집안일을 꼬박꼬박 잘합니다. 그리고 산책합니다. 홀로 강변을 걸을 때도 있고, 둘이서 걸을 때도 있습니다. 홀로 강변을 멀리 걸어갈 때 이 글들이 쓰였습니다."

이번에 시와 산문의 경계가 모호한 글을 쓰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쓰다가 보니 그렇고, 써놓고 보면 그랬다는 것이지요. 나는 때로 새와 나무와 마른 풀들의 얼굴을 마주 대합니다. 사람들이 버린 시간을 나는 살지요. 거기 고요가 있고 고요에서 태어나는 시가 있고, 겨울 강물 같은 잔잔한 산문이 있습니다. 때로 산문과 시가 섞이는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봅니다."

작가님의 시선으로 본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떠한가요.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일은 넘지 못할 수많은 경계를 지우는 것이라는 생각합니다. 남과 북, 보수와 진보, 진영 대 진영,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 사이가 너무 멀어졌습니다. 서로 오가는 다리를 아예 끊어버린 것 같습니다. 다리라는 말이 좋고 '왕래'라는 말이 좋았습니다. 조금 억지 같지만, (신간에 실린 글들에) 아마 그런 사회적인 뜻도 담겨 있지 않을까요."

이번 책에는 따님이 그린 색연필 그림이 삽화로 실렸는데요. 협업하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책에는 유독 딸하고 지낸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딸하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가 책에 많이 나옵니다. 이 글을 보고 출판사 사장이 어찌나 졸라서 그러면 그래 보자고는 했지만, 지금도 그렇게 마음이 개운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그렇지요. 그래요 그냥. 조금 어색해요. 식구하고 같이 무슨 책을 낸다는 게 영 편치 않습니다. 멋쩍고 쑥스럽지요."

봄 햇볕을 받은 섬진강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봄 햇볕을 받은 섬진강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삶이 모여서 시가 되다

평소 시를 쓰시는 스타일이 어떠한가요.

"저는 일찍 잡니다. 일찍 자기 때문에 일찍 일어납니다. 새벽 3시면 일어납니다. 몇 가지 스트레칭을 하고 세수하고 이 닦고 서재로 갑니다. 인터넷을 켜고 축구 명장면을 봅니다. 그리고 영화 리뷰와 연예가 화제들과 연속극 장면들을 클릭해서 봅니다. 그리고 신문을 봅니다. 지방지 하나, 그리고 중앙지 여덟 개쯤 봅니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찾아서 나하고 글공부하는 분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일기를 씁니다, 어제의 일기를 오늘 아침에 씁니다. 꽤 자세히 씁니다. 일기를 쓰다가 보면 일기가 시가 되기도 하고 제법 그럴듯한 산문이 되기도 합니다. 이 책 속에 많은 글이 다 그렇게 해서 쓰였습니다."

시를 쓸 때는 주로 어떤 것에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삶이 모여서 시가 되어 나옵니다. 살다가 보면, 언제 어디서 어느 순간 어떤 낱말이 떠올라 그 낱말이 낱말을 찾아 문장을 이룹니다. 문득, 정말 문득( 나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달빛이 부서지는 강물 같은 순간을 만납니다. 그러면 시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내 글들은 거의 그림입니다. 정말 신나지요. 다 잊고 맹렬하게 집중합니다. 시인은 복 받은 인간입니다. 그럴 때 두려움과 부러움이 사라집니다. 아주 너그러워집니다."

좋은 시는 어떤 것일까요.

"내 손을 떠나지 않고,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오래 머문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요. 나는 이용악과 백석과 윤동주와 김소월과 김수영과 박용래와 서정주의 시들을 읽으며 시를 공부했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시를 읽고 있습니다. 세월이 가도 내 마음과 내 손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 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요. '세월이 가도 낡지 않은 사랑'이 사랑 아닐까요."

김용택 시인은 지난 날에 대해 "아쉬움 없이 만족스러운 나날들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중앙포토]

김용택 시인은 지난 날에 대해 "아쉬움 없이 만족스러운 나날들이었다"고 말했다. [사진 중앙포토]

나는 일상을 존중한다

책에 실린 '너무 큰 옷은 소매도 찾기 어렵다'는 글에는 "나는 요새 학교 공부의 부족함을 느낀다. 학교를 더 다녔어야 했는데, 아쉬움을 느낀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사가 되어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 조그만 강 마을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교과서 외에 다른 책을 스물두 살 때쯤 처음 읽었습니다. 나는 선생을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선생만 하면서 살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내 생각이 딸릴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공부를 열심히 하자. 책을 많이 읽자. 뭐 그런 다그침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떤 것을 공부하고 싶은가요.

"나는 다시 태어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 태어나 살았으면 되었지, 하며 삽니다. 그래도 질문에 답을 한다면, 글쎄요. 다시 태어나 무슨 일을 한다면 아마 작은 종이에 작은 그림 그리는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삶을 돌이켜봤을 때 남는 아쉬움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쉬움이 없습니다. 이만큼 살았으면 되었다. 죄송하지만 절대 이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누가 들으면 화내고 욕하겠지만, 나는 나만큼 살았습니다. 이만큼 살면 되었지요. 원하는 것이 없이 책 읽고 글 쓰고 아이들하고 고향 땅에서 사는 나는, 안 이뤄진 게 없다는 게 나에 대한 나의 생각입니다. 이런 말 정말, 미안합니다. 봐주세요. 시인은 철이 없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책을 보고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냥 좋았습니다. 나는 그때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일상을 존중하고, 내가 나를 좋아합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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