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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쥔 열쇠 김구도 잡았다···한국 '최고호텔' 201호의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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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수 브랜드⑮] 국내 최장수 웨스틴조선호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레스토랑, 더 나인스 게이트.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레스토랑, 더 나인스 게이트.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요즘 대한민국에서 최고(最高) 특급호텔을 고르라면 사람들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의 장수 브랜드]⑮

혹자는 힐튼호텔계열의 최고급 브랜드 콘래드를 꼽고, 또 다른 사람은 지난 9월 국내 최초로 개관한 하얏트호텔그룹의 고급 브랜드 안다즈호텔를 꼽기도 한다. 국내 최대 체인망(19개)을 구축한 호텔롯데나 연회비가 가장 비싼 씨마크호텔, 포브스 세계 10대 브랜드 ‘삼성’이 운영하는 호텔신라를 꼽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략 5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의 호텔은 웨스틴조선호텔이라는데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1914년 10월 10일 개관한 웨스틴조선호텔(당시 사명은 조센호테루)은 한국 최고(最古) 호텔이자, 당시 독보적인 최고(最高) 호텔이었다. 물론 웨스틴조선호텔 설립 이전에도 호텔이 존재했다. 대불호텔(1888년)·스테워드호텔(1889년)·손탁호텔(1902년) 등이다. 하지만 2019년 현재까지 남아있는 호텔만 따지면 웨스틴조선호텔이 대한민국 최장수 호텔이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외경.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외경.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모던보이 핫플레이스 ‘조센호테루’

첫 개관 당시 웨스틴조선호텔. 당시 이름은 조센호테루였다.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첫 개관 당시 웨스틴조선호텔. 당시 이름은 조센호테루였다.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105년 세월동안 웨스틴조선호텔은 현재의 위치한 소공동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대한민국의 흥망성쇠를 목격했다. 처음엔 4층으로 지어진 웨스틴조선호텔 건물은 건평 1920㎡(580평)에 52개의 객실과 한식당, 양식당, 커피숍을 갖췄다. 1914년 10월 10일자 매일신보는 이에 대해 ‘진선진미(盡善盡美·선함과 아름다움을 다하다)한 조센호테루 낙성-본일부터 개업’이라는 제목으로 웨스틴조선호텔 개업을 보도했다.

최고급 호텔을 지향하던 만큼 100여년 전엔 보기 힘든 최신 서양 문물을 도입했다. 욕실엔 좌변기가 있었고, 독일산 은그릇과 뉴욕에서 제작한 샹들리에가 등장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건물도 웨스틴조선호텔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수직열차’라고 불렀다.

조센호테루 개관 당시 1층 로비.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조센호테루 개관 당시 1층 로비.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일제식민지 시대 서양의 최신 문물을 받아들인 새로운 스타일의 남성(모던보이)이나 단발·양장을 한 신식여성(모던걸)에게 웨스틴조선호텔은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인기있는 장소)’였다. 이들은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에그 베네딕트(미국식 샌드위치의 일종)와 타르타르 스테이크(독일 소고기요리)를 즐기며 신식 문물을 경험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이런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장소는 거의 없었다.

JJ마호니 저리가라…32개 조명 갖춘 디스코텍

요즘엔 그랜드하얏트호텔의 JJ마호니가 인기 클럽이지만, 1980년대 최고의 클럽은 웨스틴조선호텔의 디스코텍 제나두였다. 영국 회사가 제조한 스포트라이트를 영국 설치 기술자가 직접 웨스틴조선호텔에 방문해 조명을 설치했다. 32가지의 조명패턴이 화려하게 돌아가는 방식은 웨스틴조선호텔이 인기 클럽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 디스코텍은 청바지, 티셔츠와 운동화는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드레스코드(복장 규정)’도 존재했다.

1983년의 핫플레이스였던 웨스틴조선호텔의 첨단 디스코텍 제나두.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1983년의 핫플레이스였던 웨스틴조선호텔의 첨단 디스코텍 제나두.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국빈이 방한한다거나 외국 고위·저명인사가 한국을 찾을 땐 거의 예외 없이 웨스틴조선호텔을 찾았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당시 ‘세기의 섹스심벌’로 불리던 미국 배우 마를린 먼로가 숙박했고, 1974년 11월엔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건물 전체를 빌려 사용했다. 수행원·기자 등 방한단 전체가 이 호텔에서 머물렀다. 이를 기념해 웨스틴조선호텔은 지금도 야외수영장을 ‘포드수영장’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인사들이 거쳐갔던 웨스틴조선호텔 201호실.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수많은 인사들이 거쳐갔던 웨스틴조선호텔 201호실.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또 가수 패티 김씨는 웨스틴조선호텔 전속가수 출신이다. 자서전에서 패티 김씨는 ‘조선호텔에서 공연하다가 미국 진출 기회를 얻었다’고 기술한다.

특히 웨스틴조선호텔 201호실은 한반도를 두고 벌어졌던 열강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방이다. 당시 201호실은 ‘임페리얼 수우트(imperial suite·황제의 스위트룸)’라고 불리던 특실이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귀국 후 웨스틴조선호텔 201호실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다.

조선호텔100주년사료에 따르면 이승만 박사가 이 방을 떠난 다음에는 일본의 제124대 천황 히로히토가 이 방을 접수했다. 다음엔 러시아 황제 고문관의 아들(세르게이 루빈스타인) 여기서 묵었다가, 당시 중경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에게 열쇠가 넘어갔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박사도 한때 201호의 주인이었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 '프레지덴셜 스위트'.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 '프레지덴셜 스위트'.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이승만→히로히토→세르게이→김구→서재필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가 드나들던 호텔인 만큼 여기서 일하던 직원의 자부심도 상당했다. 1978년 웨스틴조선호텔에 입사해 2013년 은퇴한 권문현씨는 “동(銅)으로 제작했던 당시 웨스틴조선호텔 열쇠는 신용카드가 없었던 시절 신분 보증서 역할을 했다”며 “돈이 없어도 방 열쇠를 보여주면 식당에서 외상으로 음식을 주고 택시는 공짜로 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970년 재건축을 마쳤을 당시 웨스틴조선호텔.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1970년 재건축을 마쳤을 당시 웨스틴조선호텔.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유명인사가 ‘턱’하고 내놓는 팁(봉사료)도 화제였다. 이승만 박사가 당시 호텔 직원(손수산씨)에게 건낸 팁은 80원이었는데, 당시 돈으로는 쌀 반 가마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1970년 웨스틴조선호텔을 방문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는 18층에 투숙하면서 호텔에서 만난 직원 모두에게 1인당 100달러(11만8000원)를 지불했다고 알려진다.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르면 현재 화폐가치는 1970년 보다 21.5배 상승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253만7000원 가량 되는 돈을 거의 전 직원에게 뿌렸다는 뜻이다.

사우디 왕자, 전직원에게 253만원씩 뿌려  

1970년 재건축을 마쳤을 당시 웨스틴조선호텔 내부.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1970년 재건축을 마쳤을 당시 웨스틴조선호텔 내부. [사진 웨스틴조선호텔]

한때 영빈관(迎賓館·국빈 전용 숙소) 역할을 하던 과거의 명성과 비교하자면 웨스틴조선호텔은 이제 평범한 호텔 중 하나다. 1995년 신세계그룹이 웨스틴조선호텔 지분을 인수한 이후 비즈니스 호텔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외에는 과거의 명성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지금도 웨스틴조선호텔 고객의 80% 가량이 외국인이다. 또 외국인 고객의 50% 가량은 연간 25박 이상 숙박한다. 단골 고객이 많다는 뜻이다.

웨스틴조선호텔은 단골 고객 취향을 기록했다가 객실을 준비한다. 예컨대 고객이 선호하는 베개를 제공하고, 과거에 퇴실했을 때 배치와 동일하게 가구를 배치하는 식이다. 노트북 어댑터나 공기청정기 등을 요구한 기록이 있다면 재차 방문할 때 미리 요청하지 않아도 이를 객실에 준비해둔다.

웨스틴조선호텔은 “단골 투숙 고객에게 웨스틴조선호텔은 ‘서울에 있는 집’처럼 편안하게 묵을 수 있도록 객실을 준비한다”고 설명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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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오전 10시 출고한 장수 브랜드 기사에서 265만원을 2만6500원으로 잘못 기입한 사례가 있어서 정오경 이를 265만원으로 정정했습니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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