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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 어깨 26세 수준”…‘타짜’ 보라스 잭팟게임 시작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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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호 29면

김식의 야구노트

“류현진은 26~27세다.”

MLB ‘수퍼 에이전트’ #매덕스·로드리게스 등 계약 대리 #박찬호·추신수 특급 연봉 이끌어 #구단들은 “악마” 혹평 #역정보·부풀리기로 선수들 홍보 #수수료 5% 받아 연 100억대 수입 #류현진 FA 계약 #작년 권리 행사 1년 늦춘 게 주효 #올해 성적 좋아 연봉 230억 넘을듯

2019년 메이저리그(MLB) 전체 평균자책점 1위(2.32)에 오른 류현진의 스토브리그는 이 한마디로 시작했다. 만으로 32세인 류현진의 나이를 대여섯 살이나 ‘낮춰보는’ 이는 그의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67·미국)다.

최근 보라스는 “류현진은 26~27세 투수들이 던지는 것과 비슷한 이닝을 소화했다. 그것이 류현진이 가치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류현진은 지난 7년 동안 MLB 정규시즌에서 740과 3분의 1이닝을 던졌다. 류현진이 그동안 MLB에서 던진 양은 26~27세 투수가 소화한 이닝과 비슷하다는 게 보라스의 주장이다.

자유계약선수 빅3 투수들

자유계약선수 빅3 투수들

류현진은 KBO리그에서 7년을 뛰고 2013년 LA 다저스에 입단했다. 미국 유망주보다 MLB 데뷔가 늦었으니 FA 자격도 30대에 처음 얻었다. 류현진의 한국 기록(1269이닝)과 MLB 기록을 더하면 2000이닝이 넘는다. 류현진의 나이와 통산 투구 이닝을 감안하면 두 번째 FA 자격을 얻는 선수나 다름없다.

그러나 보라스는 자신이 만든 주행거리 기록계(pitching odometer)라는 개념을 이용해 이 판을 뒤집으려 한 것이다. 류현진은 연식은 14년 됐지만, 주행거리가 7년치에 불과한 수퍼카나 다름없다는 논리다. 26~27세 에이스급 투수를 영입할 때처럼 구단에 많은 돈을 준비하라고 압박할 것이다. 이 주장을 입증할 100페이지 이상의 책자를 제작해 들이밀 것이다. 류현진은 내셔널리그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선수가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보라스의 게임이다.

마감 30초 전까지 버티는 ‘벼랑 끝 전술’  

스콧 보라스

스콧 보라스

야구 유망주였던 보라스는 1975년부터 4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뛰었다. 부상과 부진 끝에 야구를 포기해야 했다. 두뇌가 비상한 그는 약학대학과 로스쿨을 졸업한 뒤 에이전트 사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보라스가 운영하는 보라스 코퍼레이션에는 100명이 넘는 야구 전문가들이 일하고 있다. MLB 출신의 스카우트, 월스트리트 출신의 경제학자, 미국항공우주국(NASA) 출신 연구원이 각종 데이터를 분석한다. 선수에게 유리한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해 몸값을 책정한다.

선수 연봉이 치솟으면 보라스가 받는 수수료(계약액의 5%)도 함께 올라간다. 현재 보라스는 계약 수수료로 연 1000만 달러(약 117억원) 이상을 번다. 2위 그룹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베이스볼플레이어스샐러리라는 매체에 따르면 2013년까지 그가 번 수수료의 합계는 1억 7500만 달러(2040억원)였다. 이후 6년이 지났으니 2억 달러(2350억원)를 돌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MLB 수퍼스타 이상으로 벌었다.

한국인 1호 메이저리거 박찬호(46)가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할 때 에이전트도 보라스였다. 그는 박찬호에게 5년 총액 6500만 달러의 대형 계약을 안겨줬다. 당시 29세였던 박찬호는 MLB 최고 투수 중 한 명이었지만 허리 통증이 약점이었다. 보라스는 “14개 팀이 박찬호를 데려가려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적극적인 구단은 텍사스뿐이었다. 가상의 라이벌을 만들어 박찬호의 몸값을 계속 높였다는 게 훗날 밝혀졌다.

보라스는 2014년엔 추신수(39)를 텍사스로 보내면서 7년 총액 1억 3000만 달러의 계약을 이끌어냈다. 당시 기준으로 이 계약은 외야수 역대 6위에 해당하는 특급 계약이었다. 2013년 류현진과 다저스의 계약(6년 3600만 달러)을 성사시킨 주인공도 보라스였다. 마이너리그 거부권 등 유리한 조건을 넣기 위해 계약 마감시한 30초 전까지 버틴 일화는 유명하다. 류현진의 배짱과 보라스의 ‘벼랑 끝 전술’이 어우러져 좋은 계약을 따냈다.

보라스는 1997년 그렉 매덕스를 시작으로 2001년 알렉스 로드리게스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의 계약을 대리했다. 성과를 낼수록 악평이 쌓여갔다. 정보와 역정보, 부풀리기 전략을 교묘하게 섞어 선수를 홍보하면서 구단의 계좌를 털었다. 미국 블리처리포트는 2009년 ‘스콧 보라스 : 사악한 제국의 황제’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즈음부터 보라스는 MLB 구단 사이에 악마로 불렸다. 그와 거래한 구단은 필요 이상의 돈을 썼다.

보라스가 성공한 주요 계약

보라스가 성공한 주요 계약

보라스가 악명을 떨치는 이유는 또 있다. 중남미 선수들에게 고리로 대출을 해주거나, 소속 선수의 금지 약물을 복용 사실을 숨겼다는 주장도 나왔다. 선수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고액 수수료를 따로 받는다. 블리처리포트는 ‘보라스가 진짜 악마는 아닐지 몰라도 많은 야구인들과 팬들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건 틀림없다’고 썼다.

이 정도 악평을 받았다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스는 여전히 ‘수퍼 에이전트’다. 지난 3월 외야수 브라이스 하퍼(27)를 필라델피아로 보내면서  13년 총액 3억3000만 달러의 계약을 이끌어냈다. 당시 MLB 사상 최고액이었다.

이제 보라스는 단순한 중개인이 아니다. 뛰어난 선수를 많이 확보하고 있기에 ‘공급자’의 지위를 갖게 됐다. 올 겨울엔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 2위 게릿 콜(29·휴스턴 애스트로스)과 월드시리즈 최우수선수(MVP) 스티븐 스트라스버그(31·워싱턴 내셔널스)가 보라스를 내세워 FA 계약을 기다리고 있다.

휴스턴과 워싱턴이 맞붙은 월드시리즈를 보고 USA투데이는 “진짜 승자는 보라스”라고 썼다. 두 명의 특급 투수뿐 아니라 내셔널리그 MVP 후보 앤서니 랜던(29·워싱턴)도 보라스와 대박 계약을 준비하고 있다. FA는 아니지만 맥스 셔져(35·워싱턴)와 호세 알투베(29·휴스턴)도 보라스의 고객이다.

투수 게릿 콜 등 ‘FA 빅3’ 내세워 판 키워

악마라는 비난을 들어도 보라스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다. 보라스는 신뢰와 신의를 바탕으로 협상하지 않는다. 선수와 고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선수의 이익만 위해서 움직인다. 보라스가 악마인 줄 알면서도 많은 선수들이 그와 손잡는 이유다.

보라스의 전략은 수백 명의 에이전트 가운데 유일하며 독보적이다. 특급 선수가 필요한 팀은 악마와 협상 테이블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그게 보라스의 시장 권력이다.

MLB 전문가 송재우 해설위원은 “좋은 선수를 보유하면 누구나 좋은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보라스는 B급 선수에게 특급 계약을 안겨주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며 “그런 사례에 자극을 받은 선수들이 보라스에게 몰려든다”고 설명했다.

류현진은 14일 귀국하면서 “계약은 에이전트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2015년 왼 팔꿈치 수술을 받고 성공적으로 재기한 그는 지난해 FA 자격을 처음 얻었다. 2018년 성적은 7승3패 평균자책점 1.97. 투구 내용은 좋았지만  왼 허벅지 부상으로 3개월을 쉬느라 82과 3분의 1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당시 FA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감지한 보라스는 다저스의 퀄리파잉 오퍼(연봉 상위 125명의 평균 연봉으로 1년 계약)를 받아들였다. 높은 연봉(790만 달러·209억원)을 받는 대신 FA 권리 행사를 1년 늦추는 모험이었다.

올 시즌에 앞서 보라스는 “류현진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상 경력이 있는 30대 투수를 지나치게 과대 포장한 것 같았다. 그러나 류현진은 올해 풀타임(182와 3분의 2이닝)을 뛰며 MLB 최고 수준의 피칭을 했다. 결국 보라스의 말이 맞은 셈이다. 1년 전과 달리 류현진은 희소성 있는 고가 상품이 됐다.

류현진은 “3~4년 계약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계약 기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국 언론은 그의 연봉이 2000만~2500만 달러(약 235억~293억원)에서 형성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텍사스를 비롯해 뉴욕 양키스, 시카고 컵스 등 다수의 구단이 류현진을 원한다는 현지 기사가 나오고 있다.

보라스는 여러 구단을 사이를 오갈 것이다. 자신이 가진 에이스 카드 3장(콜, 스트라스버그, 류현진)을 번갈아 제시하며 판을 키울 것이다. 장기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보라스의 특성을 감안하면, 협상은 해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구단들과 벼랑 끝까지 갈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보라스가 이길 것 같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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