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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이 잘못했다" 전쟁영웅 美외교관의 소신

중앙일보

입력

빌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대행이 13일(현지시간) 미 하원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조사 공개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빌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대행이 13일(현지시간) 미 하원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조사 공개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탄핵조사 공개 청문회가 시작된 지난 13일(현지시간) 미 하원.

트럼프 탄핵 청문회 생중계 첫날 #첫 증인 우크라 대사 스타 떠올라 #폭스뉴도 "정치 편향 없는 증인" #"정치 이익 위해 군사지원 보류는 #미친 짓"…미 관료제 힘 보여줘

첫 증인으로 나온 윌리엄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대행에게 공화당 존 래드클리프 의원이 물었다.

“지난 7월 25일 트럼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전화 통화기록 어느 부분이 탄핵할 만한 위법행위인지 지적할 수 있습니까?"

테일러 대사대행이 답했다.

“의원님, 저는 탄핵을 결정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제가 여기에 온 이유가 아닙니다. 그건 당신이 할 일입니다.”

외교관으로서 전문성, 풍부한 경험, 뚜렷한 국가관, 간결한 어법과 여유 있는 태도. 21년 만에 열린 미 대통령 탄핵 청문회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테일러 대사대행은 공개 청문회 첫날 조지 켄트 국무부 유럽ㆍ유라시아 담당 부차관보와 함께 증인으로 출석했다. 5시간여에 걸쳐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말했다.

트럼프에게 불리한 새로운 사실도 증언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지 명료하게 설명했다. 전국으로 생중계된 공개 청문회 첫날, 첫 증인으로 민주당이 그를 세운 이유였다.

트럼프 직접 관여했다는 새로운 증언

테일러는 지난 7월 26일 트럼프 대통령과 고든 선들랜드 유럽연합(EU) 주재 미국대사의 통화를 대사관 직원이 우연히 들었다고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한 식당에서 선들랜드가 트럼프에게 휴대폰으로 전화해 우크라이나 대통령 수석고문과 만남을 보고했는데, 트럼프가 “수사”에 관해 물었다는 것이다. 선들랜드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진행할 준비가 됐다고 답했다.

통화가 끝난 뒤 직원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선들랜드는 트럼프가 “바이든에 대한 조사”에 더 관심을 갖고 있으며, 트럼프 개인 변호사 루디 줄리아니가 압박을 가하는 중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테일러는 이런 이야기를 지난주에 들었기 때문에 지난 10월 22일 비공개 청문회 증언에서는 밝히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금을 주는 대가로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비리를 수사하라고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테일러 증언이 사실이라면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정부가 바이든을 수사하는 문제를 직접 챙겼다는 의미가 된다.

테일러 증언에 관해 묻자 트럼프는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런 통화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빌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대행이 13일(현지시간) 미 하원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조사 공개 청문회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빌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대행이 13일(현지시간) 미 하원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조사 공개 청문회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베트남전 참전 영웅 출신 베테랑 외교관

테일러는 모두 발언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이후 트럼프 대통령까지 7명의 대통령에 의해 공직에 임명됐다고 말했다.

1969년 미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 동기생 800명 가운데 5등으로 상위 1%에 들었다. 베트남전에 참전, 동성훈장 등 공로를 인정받은 전쟁 영웅이다.

하버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외교관 길을 걸었다. 구소련과 동유럽,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근무했다. 2006~2009년 우크라이나 대사를 역임했으며 2013년 퇴임했다.

지난 5월 트럼프는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마리 요바노비치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를 해임했다. 공석을 채우기 위해 은퇴한 테일러를 급히 불러들였다.

테일러는 6월 키예프에 부임했을 때 미국 외교정책이 매우 혼란스럽고 이례적인 상황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외교정책 결정과 실행에 두 개의 채널(경로)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나는 정상적인 것, 다른 하나는 대단히 비정상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주무부처인 국무부는 옆으로 밀려났고, 비선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관할하지 않는 선들랜드 대사와 트럼프 개인 변호사 줄리아니 등이 우크라이나를 직접 상대한 것을 말한다.

빌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대행(왼쪽)과 조지 켄트 국무부 유럽유라시아 담당 부차관보가 13일(현지시간) 미 하원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조사 공개 청문회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빌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 대행(왼쪽)과 조지 켄트 국무부 유럽유라시아 담당 부차관보가 13일(현지시간) 미 하원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조사 공개 청문회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폭스뉴스도 “정치 편향성 없다” 인정

트럼프 생각을 가장 잘 반영하는 폭스뉴스도 테일러를 좋은 증인으로 인정했다.

폭스뉴스 앵커 겸 정치비평가 크리스 월리스는 테일러 증언을 들은 뒤 “매우 인상적”이라면서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입혔다”고 말했다.

그는 “테일러는 러시아 침략과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이 미국 국가안보에 이익이라는 한 가지 관점만 줄곧 말했다”면서 “당파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테일러는 "국내 정치에 이용하기 위해 외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보류하거나 조건을 거는 것은 '미친 짓(crazy)'이며 잘못됐다(wrong)”고 주장했다.

“어떤 점이 잘못됐느냐”는 민주당 의원 질문에 그는 “미국의 외교 정책을 개선하거나 수행하고, 국민 세금이 잘 쓰이도록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지원에 조건을 걸 수 있다”고 답했다.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는 “진짜 전문가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증언할 때 어떤 모습인지 보여줬다”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일은 간단하지 않은데, 테일러와 켄트는 증언을 통해 상황을 명료하게 했다”고 평했다. 미국 관료제의 힘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크롱카이트 목소리’ 신뢰도 높여

장교와 직업 외교관으로 단련된 언행도 증언 신뢰도를 높였다. 그를 공격하려 시도한 공화당 의원들을 평정심으로 압도했다.

공화당 의원이 “당신이 저쪽(민주당)이 내세운 스타 증인이냐”고 비꼬자 덤덤한 표정으로 “나는 스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주ㆍ공화 어느 당이든 추측성 질문에는 단호히 답변을 거절했다. “그렇다” “그렇게 생각한다”“동의한다” 같은 명료한 대답이 청문회에 속도감을 더했다.

일리 있는 질문에는 수긍했다. 공화당 의원이 “증언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한테 들은 말인데, 그들이 잘못 들었거나 틀렸을 수 있지 않으냐”고 묻자 테일러는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며 동의했다.

굵고 안정적인 목소리도 신뢰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트위터에서는 미국의 전설적인 뉴스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1916~2009) 목소리와 닮았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옛 뉴스 동영상이 돌았다. CBS 메인 뉴스를 19년간 진행한 크롱카이트는 60~70년대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은 언론인으로 꼽혔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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