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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문 대통령 맞냐”는 소리 나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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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23일 종료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은 역사에 길이 남을 외교 참사다. 한·일 외교사에서 최대 악수로 꼽혀온 2012년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무색하게 한다. 그가 독도를 찾자 일본에서는 혐한 바람이 불어 결국 한·일 관계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었다.

지소미아 실책 부처 의견 무시 탓 #MB 독도 방문 때도 똑같은 잘못 #오판 깨끗이 인정하는 용기 필요

눈길을 끄는 건 두 상황이 여러모로 닮았다는 거다. 첫째, 두 대통령 모두 정부 내 전문가 그룹인 해당 부처의 의견을 깔아뭉갰다. 비정상적 의사 결정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지소미아부터 복기해 보자. 파기 주장이 머리를 들자 국방부와 외교부, 국정원 모두 반대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파기 결정 바로 전날 국회에서 이랬다. “도움 되는 부분이 있으니 신중하게  검토하는 것”이라고. 나중에 돌긴 했지만,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비공개회의에서 “한·미·일 안보 협력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가장 거세게 반대한 건 서훈 국정원장이었다. 그는 지난 8월 초 국회 정보위에서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신중히 해야 한다. 내용상 실익도 중요하고, 상징적 의미도 중요하다”고 답했다는 게 의원들의 전언이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한 뒤 지소미아 파기를 선언했다. 본인 결단이든, 진언 탓이든, 부처들 의견이 묵살된 것만은 틀림없다.

독도 방문도 그랬다. 주무 부서인 외교부는 펄쩍 뛰었지만, 청와대는 강행했었다. 한 고위 외교관은 “당시 외교부 수뇌부가 목을 걸고 말리지 않은 건 엄청난 실책”이라고 회상한다. 2012년 8월 국회에 나온 김성환 당시 장관이 “지방 순시의 일환이어서 외교부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은 것도 독도 방문이 비정상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둘째, 국내 정치를 위해 한·일 관계가 이용됐다. 지소미아 파기는 조국 사태가 본격화됐던 8월 말 무렵 결정됐다. 문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 부정 평가(49.2%)가 긍정 평가(46.7%)를 앞서는, 이른바 ‘데드크로스’가 나타난 때와 일치한다. 조국 사태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뤄진 것 아니냐는 의문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MB 때는 친형 이상득 전 의원 등 측근 구속으로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지자 독도 방문이 튀어나왔다. 반일 감정을 자극해 지지율을 만회하려는 전략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자극적인 표현까지 곁들여져 사태가 더 악화한 점도 똑같다. 문 대통령은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 조치가 내려지자 “절대 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MB는 일왕 방한 문제와 관련, “한국에 오려면 독립운동가들에게 사죄하라”고 말해 일본 측 반발을 샀다. 요컨대 두 대통령 모두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해 역사에 남을 해악만 남긴 꼴이 됐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결정을 뒤집을 명분이 없다며 망설이다가는 화만 더 키운다. 조국 사태 때 일찍 낙마시켰더라면 최악은 피할 수 있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지소미아 폐기를 밀고 나가다간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 오판을 깨끗이 인정하는 것도 용기이자 지혜다. 대북 포용정책 신봉자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10월 첫 북핵 실험이 감행되자 정책 실패를 화끈하게 시인하고 대북 제재로 돌았다. 핵실험 당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포용정책만 계속 주장하기는 어려워졌다는 게 객관적 상황”이라며 “북한이 어떤 일을 하든 다 수용해나갈 수 없게 됐다”고 털어놨다. 예상보다 강도 높은 발언 수위에 언론에는 ‘노무현 대통령 맞습니까?’라는 제목의 칼럼까지 실렸다. 현 정부도 필요하면 “문 대통령 맞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앞으로도 청와대가 정부 내 전문가들의 의견마저 듣지 않는다면 심각한 헛발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역사에서 못 배우면 반복하게 돼 있다”는 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지적은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