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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칠레 르포]지도부 없는 시위대···아이들도 "피녜라 탄핵"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일 칠레 산티아고 시위에는 아이들도 "피녜라 대통령 탄핵, 더 좋은 교육을 위해서, 우리가 칠레의 미래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참여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칠레 산티아고 시위에는 아이들도 "피녜라 대통령 탄핵, 더 좋은 교육을 위해서, 우리가 칠레의 미래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참여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에서 폭발한 칠레 사태가 보름 넘게 계속되고 있다. 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5) 개최 포기란 국제적 망신에도 불구하고 오랜 빈부 격차에 대한 시민 반발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시위대가 공공요금 뿐 아니라 의료·복지 개혁은 물론 우파 성향의 억만장자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의 하야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자 남미에선 다른 나라에 비해 부국인 칠레는 불평등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국제 신인도 추락은 물론 정권 위기로 치닫고 있다.

50원에 폭발한 칠레 시위 현장을 가다

수도 한복판 지하철역 불탄 채 돌무더기로 폐쇄

초유의 APEC 정상회의 개최 포기 선언 이후 맞은 첫 주말인 현지시간 2일 오후. 칠레 수도 산티아고 중심 이탈리아 광장(Plaza Italia)에 도착하자 매캐한 최루 가스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전날에도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시위가 벌어졌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라 모네다(la Moneda) 대통령궁까지는 900미터 거리다. 이곳의 산티아고 바케다노 지하철역 입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불에 탄 입구는 마치 포탄을 맞은 듯 무너진 돌무더기로 막혀 있었다.

2일 오후 칠레 대통령궁과 인접한 산티아고 바케다노(BAQUEDANO) 메트로 역 입구가 불에 탄채 돌무더기로 폐쇄돼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대통령궁과 인접한 산티아고 바케다노(BAQUEDANO) 메트로 역 입구가 불에 탄채 돌무더기로 폐쇄돼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 시위 중심지인 바케다노역 버스정류장은 시위의 여파로 천장 유리가 깨지고, 전광판은 불타고 신호등도 부서져 있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 시위 중심지인 바케다노역 버스정류장은 시위의 여파로 천장 유리가 깨지고, 전광판은 불타고 신호등도 부서져 있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지난달 10월 25일 120만명 참가로 정점을 찍은 시위는 매일 오후 5시 이곳 이탈리아 광장에서 시작해 대통령궁을 포함한 시내 다른 곳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인근 버스정류장은 천장이 부서졌다. 버스 안내 전광판은 불에 타 뼈대만 남았다. 신호등도 곳곳에서 파손된 채 흉물처럼 매달려 있다.

“약조차 살 수 없다. 부자에게 먼저 간다” 

시위 시작 1시간 전. 한산하던 광장을 시위대가 메우기 시작했다. 연인과 가족 단위 시위대도 눈에 띄었다. 칠레 국기와 이곳 원주민 마푸체(Mapuche)족의 깃발, 칠레 유명 프로축구단 깃발을 흔들며 피녜라 대통령의 탄핵과 하야를 외쳤다. 부부젤라를 불고 냄비를 두드리며 연금과 의료, 교육 개혁 등 사회복지 전반의 개혁도 요구했다. 지나는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동조했다. 이즈음 경찰 진압차도 광장 주변에 속속 배치됐다. 쇠 냄비를 들고나와 두드리던 델리아 시푸엔테(78)는 “약조차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재고가 있어도 부자들에게 먼저 돌아간다. 사회가 너무 불평등하다”며 시위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쇠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에 참여한 델리아 시푸엔테(78) 할머니는 "약조차 살 수 없다. 재고조차 부자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쇠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에 참여한 델리아 시푸엔테(78) 할머니는 "약조차 살 수 없다. 재고조차 부자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아이들도 피녜라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시위에 동참했다. 아이들이 든 손팻말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육을 받으면 부자들이 두려워한다""피녜라 탄핵, 더 좋은 교육을 위해서, 우리가 칠레의 미래다""교육의 품질, 적절한 월급, 피녜라가 탄핵돼야 내 꿈이 이루어진다"고 적혀 있었다.

여대생인 안젤라 페냐는 2일 시위 현장에서 "민영병원은 비싸서 공립병원을 이용해야 하지만 포화상태라 해택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여대생인 안젤라 페냐는 2일 시위 현장에서 "민영병원은 비싸서 공립병원을 이용해야 하지만 포화상태라 해택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그 사이 광장 주변에 경찰 진압차도 속속 배치됐다. 수백 명이 광장 중심을 에워싸고, 시위 시작 시각이 임박하자 경찰이 경고 방송에 나섰다. 이어 곧바로 강제 해산이 시작됐다. 경찰은 최루 가스와 최루액을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분사했다. 터지는 최루 가스에 놀란 한 시위 참여자가 연기를 피해 도망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위대는 돌을 집어 들어 경찰 차량을 공격했다. 이렇게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촉발된 칠레의 대규모 시위는 이날 16일째 계속됐다.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경찰 진압차량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고 최루액을 분사하고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경찰 진압차량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고 최루액을 분사하고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경찰 진압차량이 시위대를 향해 체류탄을 쏘고 최루액을 분사하자 시위대가 도주하고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경찰 진압차량이 시위대를 향해 체류탄을 쏘고 최루액을 분사하자 시위대가 도주하고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경찰 진압차량이 최루탄을 발사해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한 시위대가 도망치고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경찰 진압차량이 최루탄을 발사해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한 시위대가 도망치고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지하철 요금 인상, 서민 소득 4분의 1 교통비”

칠레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41위권, 중남미 국가로는 멕시코와 함께 OECD 가입국이다. 하지만 소득 불평등 수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코스타리카에 이어 OECD 세 번째로 높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을 종식하고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30년이 됐는데 빈부 격차와 사회, 경제적 불균형은 오히려 확대됐다.

칠레는 2018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득불평등 지수가 0.46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코스타리카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OECD]

칠레는 2018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득불평등 지수가 0.46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코스타리카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OECD]

법정 최저임금은 월 27만 6000페소(2018년 기준, 약 43만원)인데, 지하철 요금이 출퇴근 시간의 경우 편도 800페소(약 1250원)이다 보니 서민 부부는 하루 지하철 출퇴근에만 3200페소가 들어 최저임금의 4분의 1 가량을 교통비로 써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30페소(약 50원) 인상안은 그동안 쌓여 있던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시위 초기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 문제다(NO SON 30 PESOS, SON 30 AÑOS)”라는 구호가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피녜라 대통령이 요금인상을 백지화하고 전기요금 인상 철회와 기초연금 인상 등의 대책을 내놨지만 불붙은 민심은 쉽게 꺼지지 않고 있다. 그사이 대통령 지지율은 14%로 추락했다.

시위 속 경제 손실 14억 달러 추산

인명과 재산 피해도 속출하고 있다. 현지 언론은 이번 시위 과정에서 최소 23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인권단체인 인권 국립연구소는 1573명이 다쳐서 입원했으며, 그중 473명이 경찰의 공기총에 맞아서 다쳤다고 집계했다. 또 여성 시위대가 성추행당한 사례가 18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 같은 인권 침해 의혹이 제기되자 유엔 인권위원회는 담당자 3명으로 구성된 조사팀을 칠레에 파견해 10월 28일부터 11월 22일까지 인권침해 의혹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 상태다. 또 이번 시위로 경제 손실이 14억 달러, 지하철 4억 달러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된다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지도부 없는 시위대, 어디로 갈지 불투명

칠레 싱크탱크인 아테나 랩에 따르면 시위대는 크게 3가지 그룹으로 나뉜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규모로 움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지하철역을 공격하는 ‘급진적 무정부주의자’와, 혼란을 틈타 상점을 약탈하는 ‘기회주의자’, 또 피켓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거나 냄비 두드리기 등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그룹이다. 아테나 랩은 그러면서 현재까지 3개 그룹 중 어느 그룹에도 눈에 띄는 리더가 없다고 분석했다. 현지 언론의 보도도 대체로 일치한다. 시위대의 요구가 연금과 의료, 교육, 공공요금 개혁에서부터 헌법개정과 대통령 하야와 탄핵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시위대가 소화전을 들고 경찰 진압 차량을 공격하고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2일 오후 칠레 산티아고에서 시위대가 소화전을 들고 경찰 진압 차량을 공격하고 있다. 이광조 JTBC 촬영기자

현지 외교소식통은 “지도부나 대변 세력이 없다 보니 시위대의 목소리를 모아 하나로 전달하는 기능이 전혀 없다. 그렇다 보니 시위대가 원하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부가 누구하고 어떻게 협상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다.
야당도 “국민이 원하는 건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대수술”이며 “개헌 등을 통해 기본적인 틀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시위대의 목소리를 제도권으로 담아내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시위대는 앞으로도 계속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칠레 사태가 언제까지 갈지 현재로선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산티아고(칠레)=임종주 특파원 lim.jongju@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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