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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제비뽑기, 오멜라스, 그리고 쿠오바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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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중세 유럽인들에게 범죄자의 처벌은 짜릿한 오락이었다. 죄수가 고문받는 광경을 사람들이 구경하는 걸 너무나 좋아해서 당국이 처형을 미루기도 했다. 물론 죄수들은 빨리 죽여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사형수가 목이 잘리기 직전에 망나니를 용서한다고 말하거나 화형대에 오른 방화범이 멋진 참회 연설을 하면 구경꾼들은 감동받아 다 같이 울었다.

피의 유흥 즐겼던 고대 로마인 #죄수 고문이 오락이었던 중세 #우리 시대 인터넷 여론재판은

요한 하위징아의 명저 『중세의 가을』에 나오는 얘기다. 하위징아는 중세인들이 잔인한 정의감을 지녔으며, 가혹한 형벌과 자비라는 양극단만 알았다고 분석한다. 중세 유럽인들은 한 마디로 어린아이 같았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감동받았으며, 법을 어긴 사람에게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인터넷에서 매일 벌어지는 연예인 여론재판을 볼 때마다 이 책을 떠올린다. 지금 한국 인터넷 풍경이 중세 유럽을 닮았지 않은가. 어느 연예인이 말실수를 하면 우르르 몰려가 돌팔매질한다. 견디지 못한 그에게 비극이 닥치면 분위기가 반대로 뒤집힌다. 군중은 울고 슬퍼하면서 이제 다른 곳으로 돌을 던진다.

상당수 한국인이 아직 중세에 살고 있는 걸까. 인터넷 이용자층이 유독 미성숙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지금의 온라인 공간에 뭔가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걸까. 어느 연예인이 집단 괴롭힘 가해자일 거라는 심증만으로 수천 명이 그를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자가당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너의 괴롭힘은 악하지만 나의 괴롭힘은 정의롭다?

인간은 모두 똑같이 존엄한 존재지만 ‘쉽게 돈 버는 사람’은 좀 혼나 봐도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이 밑에 있는 걸까? 나는 대중이라는 갑이고, 너는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을이니까,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는 갑질의 논리인 걸까?

말로 하는 공격은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니까 대단치 않다고 보는 걸까? 그런데 신경과학자들은 최근 뇌가 육체적인 고통과 사회적으로 거부당하는 경험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타이레놀을 먹으면 실연의 아픔이 줄어들고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면 몸의 통증이 줄어든다.

그렇다면 악플 수천 개는 정말로 돌팔매와 똑같은 폭력인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인터넷 조리돌림을 중세의 화형대만큼이나 야만적인 관행으로 기억할지 모른다. 혹시 이걸 사회 발전의 성장통이라고, 필요악이라고 믿는 걸까? 악플의 피해자는 안 됐지만 그런 비판을 통해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높아지니 전체적으로는 괜찮은 일이라고? 이게 양도할 수 없는 표현의 자유라고?

셜리 잭슨의 유명한 단편소설 『제비뽑기』가 생각난다. 매년 6월 제비로 한 사람을 뽑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는 마을 이야기다. 돌멩이에 머리를 세게 맞은 희생자가 비명을 지르지만 어른도 아이도 돌팔매를 멈추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풍년이 온다고 믿는다.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도 떠오른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도시 오멜라스의 지하실에서 한 아이가 끔찍하게 학대당한다. 누구라도 아이를 돕는 순간 오멜라스 시민들이 누리는 행복은 사라진다는 저주가 걸려 있다. 사람들은 아이의 고통을 알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오멜라스는 과연 낙원인가.

그저 다들 화가 나 있고, 분풀이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 필요한 것뿐일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츠의 역사소설 『쿠오바디스』에서 네로 황제는 로마에 불을 질러놓고 시민의 원성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기독교인을 학살한다. 로마인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가 기독교 신자들을 산 채로 뜯어먹는 모습에 열광한다. 로마인들은 집으로 돌아가 피의 흥분이 가라앉으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 잤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신을 속이기는 어렵지 않다. 희미한 죄책감은 다른 시민들을 탓하면서 지우면 된다. ‘다들 어쩌면 그렇게 잔인하담. 우리 로마의 문화는 그리스에 비하면 너무 천박해. 그런데 내일은 무슨 경기가 열린다고 했지?’

죽은 자들의 결백이 드러난 뒤에는 네로를 비난했을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인이 불을 질렀다고 가짜 뉴스를 퍼뜨린 황제야말로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이지. 우리는 거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어. 이래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해.’

『쿠오바디스』 후반부에 로마에서 도망치던 베드로가 예수의 환영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베드로가 묻는다.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도 묻고 싶다. 집단지성이여, 인터넷 민주주의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