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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전 평점 테러 ‘82년생 김지영’ 흥행은 날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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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영화에서 지영(정유미)은 ’누군가의 엄마, 아내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지만, 가끔은 어딘가 갇혀있는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서 지영(정유미)은 ’누군가의 엄마, 아내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지만, 가끔은 어딘가 갇혀있는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페미니즘 영화’란 선입견 탓에 개봉 전 평점테러에 시달렸던 영화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이 23일 개봉해 연일 흥행 1위에 오르며 닷새 만인 27일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개봉 닷새 만에 관객 100만 돌파 #관람객 평점 남녀 모두 9점대 #원작보다 위로·화해·희망 강조 #“2030 남성 박탈감이 선입견 낳아”

영화는 1982년생 경력 단절 여성 김지영(정유미)의 평범한 삶을 그렸다. 결혼과 육아로 인해 직장을 원치 않게 그만두고 공허감에 시달리던 그는 언젠가부터 친정엄마, 외할머니, 대학선배 등 주변 여성들에 빙의한 듯 속의 말을 털어놓는다.

2016년 10월 출간돼 누적 120만 부 판매된 조남주 작가의 동명 소설이 토대다. ‘PD수첩’ 등 TV 시사프로 작가로 일하다 육아로 인해 계획에 없던 전업주부가 됐던 조 작가는 82년생이란 설정에 대해 “제도적 불평등이 사라진 시대에도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여성에 대한 제약과 차별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런 원작을 실제 ‘워킹맘’인 김도영 감독이 연출해 장편 데뷔했다.

배우 공유(왼쪽)가 정유미와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배우 공유(왼쪽)가 정유미와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예매 관객 성비는 여성이 압도적. CJ CGV는 예매자 중 여성이 77%, 롯데시네마는 74.4%, 네이버 66% 등이었다(이하 27일 기준). 그러나 실 관람객 평점은 남녀 할 것 없이 10점 만점에 9점대로 호평이 우세했다. 원작이 페미니즘 필독서로 꼽히며 개봉 전 남성은 1점, 여성은 10점 만점을 주며 평점 성 대결이 벌어졌던 네이버 영화 사이트에서도 개봉 후 실 관람객 평점은 여성(9.6)과 남성(9.5)이 나란히 높았다.

온라인 관객 후기도 “10년 전 아이와 지지고 볶고 울고 웃으며 살았던 저를 돌아보고 안아줄 수 있었다” “아내와 장모님 모습이 겹치면서 눈물이 범벅됐다” “영화 보고 나오는 길 … 남편들이 아내의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으며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등 공감을 표한 것이 많았다.

여성의 고충을 호소하는 데 집중한 원작을 대중영화로 옮기며 위로와 화해에 초점 맞춘 각본도 한몫했다. 소설에선 평면적인 캐릭터에 그쳤던 남편 대현(공유)도 영화에선 지영을 헤아리려 애쓰는 인물로 거듭났다. 가부장적인 태도로 지영에게 상처를 줬던 아버지(이얼)도 영화에선 무뚝뚝한 발언 뒤에 감춘 서툰 진심이 그려진다. 오빠들 뒷바라지에 교사 꿈을 포기한 자신의 처지를 대물림하지 않으려, 딸들에게 “얌전히 있지 마. 막 나대”라며 응원했던 지영의 엄마 미숙(김미경)은 원작 그대로의 모습으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극 중 지영의 가족.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공감 가게 그려진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극 중 지영의 가족.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공감 가게 그려진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관객 사이에도 “(남녀) 편 가르기 영화가 아니다. 결혼 후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나’로서 살아가기엔 사회적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했고 그 과정의 현실이 공감되고 눈물 났다”는 반응이 나온다. 허남웅 영화평론가는 “영화는 남자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과 남성이 어깨동무하고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라면서 “남편의 상징적인 대사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는 이제 아는 것만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강유정(강남대 교수) 영화평론가는 “소설은 여성의 삶에 관한 연대기 형식의 보고서처럼 냉정했다”면서 “영화는 이를 1인칭 김지영 캐릭터의 사연으로 녹여내며 논란의 여지를 상당 부분 덜어냈다. 다만, 희망적으로만 그린 결말은 조금 불편했다. 대중적 선택이지만 원작의 현실고발성이 훼손된 면이 있다”고 했다.

공유(左), 정유미(右).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공유(左), 정유미(右).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일부 남성들의 반발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학진학률조차 여자가 남자를 추월한 세대다” “62년생이면 인정하겠는데”라며 김지영의 아픔에 동의할 수 없다는 댓글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영화 내용과 무관한 여성 혐오 ‘악플’과 ‘평점 테러’다. 강유정 평론가는 “요즘 젊은 남성들은 자동연상 반응 같이 ‘82년생 김지영’, 하면 남자 무시하는 여자 얘기란 잘못된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면서 “20~30대 남성들은 소위 말하는 산업화·권위주의 세대가 가졌던 가부장제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 채 세계 보편적인 여성평등 흐름을 맞았다. 이런 과정에서 (여성에게) 불공정하게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올해 앞서 ‘캡틴 마블’ ‘걸캅스’ 등 여성 영화가 나올 때마다 개봉 전부터 반복되는 평점 테러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는 “최근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평점 테러가 반복되고 있는데 언론이 주목하며 더 화제가 되고 있다”면서 “이런 현상을 굳이 조명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번 영화 캐스팅 순간부터 악플에 시달린 배우 정유미도 “인터넷에 드러난 의견이 전부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82년생 김지영’의 흥행은 계속될 듯하다. “#정말 슬프고 재밌고 아프고”(배우 최우식) “우리 모두의 이야기”(수지) “부정한 소리에 현혹되지 마시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시기를 바란다”(유아인) “좋은 영화, 재밌는 영화, 꼭 대박 나길 바라는 영화”(한준희 감독) 등 충무로에서도 SNS 지지가 잇따른다. 예매 사이트에선 벌써 “3번 봤다”는 N차 관람객도 나왔다.

앞서 일본·중국·대만에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원작에 이어 영화도 해외 선전이 기대된다. 이미 대만·호주·홍콩·싱가포르·베트남 등 37개국에 선판매됐다. 아시아권을 휩쓴 ‘부산행’의 배우 공유·정유미가 다시 뭉친 것도 흥행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보인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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