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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우파라는 격렬한 대결의 언어, 이젠 넘어서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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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호 22면

빠른 삶, 느린 생각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gaga@joongang.co.kr

조국 교수가 관련된 일이 일단락이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다시 거론하는 것은 지겨운 일이면서도 쉽게 피할 수는 없는 일로 보인다. 잘잘못을 떠나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쁜 일이어도 배울 것은 있다’로 시작하는 양선희 대기자의 중앙SUNDAY 칼럼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보, 무엇을 어떻게 나아가게 할까 #보수는 무엇을 보존하고 지켜갈까 #건전한 에토스·신뢰가 없는 사회 #모두가 공감할 가치부터 확인해야

양선희 대기자의 글이 처음에 지적하는 것은 정치와 공적 직무 수행에서의 부정과 위선의 문제이다. 그런 다음 정치 공간에서 작용하는, 그리고 작용해야 하는, 요인으로서 에토스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정치에서, 지지와 반대, 찬반을 만들어내는 분위기나 여론을 가리킨다. 조국 사태의 문제점은 이러한 에토스에서 나오는 신뢰의 부재에 관계된다고 한다. 이러한 신뢰의 확보가 없이 정치를 밀고 나가는 것은 무리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개혁이 사익의 도구 되는 것 경계해야

에토스라는 말의 의미는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볼 수 있다. 거기로부터 유래된 ‘에틱’, ‘에식(ethic)’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함축적으로 윤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것은, 사회에 존재하는 일반적 문화, 즉 일정한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는 문화를 말하면서, 나아가 거기에 스며있는 윤리 도덕의 기준을 상기하게 한다. 여기의 윤리 도덕은 문화가 지니고 있는 사고(思考)의 전통에서 정치(精緻)한 비판적 반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사회적 행동에 부딛치고 또 스스로 행동할 때, 작용하는 것이 이러한 윤리 의식을 포함하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다. 정치도 이러한 기준을 완전히 피해 갈 수는 없다.

우리의 정치에서 중요한 판단의 기준, 또는 편가름의 표지가 되는 것은 좌나 우, 또는 진보라든가 보수라는 구분이다. 공적 신뢰를 벗어나는 여러 의혹으로 하여 수난의 대상이 된 조국 교수에게 주어지는 여러 지지(支持)는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좌파 정치를 표방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 점이, 반대 입장에서는 공공 윤리의 문제를 떠나서도, 그를 끌어내려야 하는 이유가 된다.)

좌파적 관점에서는 그는 정부의 검찰 개혁을 떠맡는 주역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뢰를 얻지 못하는 그가 개혁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검찰 개혁은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것인가? 분명한 설명을 쉽게는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개혁의 의도가 무엇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해석으로는 공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권한을 엄격하게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사하게 한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의 정부는 자신들의 확신을 지나치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여타의 국민에게 설명하는 것을 부질없는 일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 일반적으로 검찰권이나 법의 집행이 엄격하게 법을 준수하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은, 법과 공무의 집행이 사사로운 이해관계는 물론 정치의 책략적 의도로부터도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볼 때, 검찰 개혁의 의도는 정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 그리고 사회적 공간에서의 인간 행위는 착잡한 함의를 가질 수 있다. 특히 건전한 에토스가 부재하는 사회에서 그렇다. 그리하여 공무 집행이나 공권력 행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진다고 하여도, 반드시 정치적 엄정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정치와 거리를 지키게 한다는 것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정치 세력을, 적대적인 정치 세력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일 수 있다. 또는 정치적 중립을 굳게 하는 것이 바로 어느 한 쪽의 이익을 옹호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정치의 시장 개입을 배제하는 것이 경제의 자유와 번영을 확보하는 방편이라는 주장은 자유시장경제를 말하는 이론에서 기본적인 신조이다. 또 그것은 근본적으로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방편이라고도 말하여진다.

다른 관점에서는 이러한 자유시장론은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려는 것이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유시장에 의한 삶의 왜곡을 정치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반대로 어떤 명분을 가지고 있든, 정치 정책은 특정 집단 또는 개인의 이해관계를 배경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는 그것이 국가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이익에 관계되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되는 경우도 있다. (석유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 그 개발권이 그렇게 활용되는 것은 자주 보는 사례이다. 석유 자원이 국가 소유가 되면서, 사실에 있어서는 그 소유권에서 생겨나는 이익은, 흔히 ‘올리각’이라 불리는 소수 특권자들의 전유물이 되게 하는 것이 그런 사례이다.) 이렇게 경제와 정치의 큰 전망을 떠나서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정책 결정은 특히 권력 투쟁에 있어서 또는 관계자의 사익을 챙기는 데에 있어서, 어떤 숨은 의도를 가진 것일 수 있다.

또는 정부 정책들은 삶의 현실에 관계되기보다도 정부의 개혁 의도를 구호처럼 과시하는 효과를 겨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시행자의 자기만족의 행위가 된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기타 작업 조건을 향상하는 조처들을 취해왔다. 다만 이것이 전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에 대한 설득은 불충분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조처들은 ‘소득주도성장’을 겨냥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심리적으로 또 사실적으로 크게 호소력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대통령의 취임사에 나온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구절은 이제 명구(名句)가 되었지만, 그것은 구체적 현실에 쉽게 연결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는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은 흔히 좌우로 또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구분된다. 좌나 우라는 말에는 우리 역사 또는 세계사적인 테두리에서 연상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혁명이나 잔학한 유혈 투쟁까지도 연상하게 하는 정치 관용구이다. 진보와 보수는 정치 프로그램으로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진보’는 무엇을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인가? ‘보수’는 무엇을 보존하고 지키겠다는 것인가? 지금의 세계사적 관점에서, 그 어느 쪽도 유혈 투쟁으로 어떤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계속 큰 변화를 경험하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는 좌우의 차이 없이 정치와 국민의 목표는 보다 나은 삶의 조건의 창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여 그것은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성취하겠다는 것으로 말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으로 나아가는 속도나 목표의 종착점이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 건국 원리는 ‘공정함, 기회 균등’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의 저서에 『불평등의 대가(代價)』라는 것이 있다. 책의 표제에 나와 있는 부제(副題)는 ‘오늘의 사회 분열이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가’이다. 우리에게는, 아마, 미래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물론 미국의 경우에도 발전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경우 사회적 분열을 가져오는 불평등의 해소가 가장 핵심적인 국가 과제인 것은 틀림이 없다. 이 저서를 처음 유발한 것은 2008년의 금융위기와 그에 뒤따른 경제 공황이다. 이 위기의 시점에서 미국 사회의 문제점들이 예리하게 부각되었다. 그런데, 그 때의 문제점은 그 후에도 해결 없이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속하는 불편한 현실로서의 불평등은, 스티글리츠 교수의 진단으로는, 주로 은행과 대기업, 자본가 계급의 통제 없는 전횡에 연유한다. 그는 미국이 보다 균형과 조화를 갖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유층의 부당한 축제를 억제하고, 다른 계층의 국민들의 소득 불평등 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그리고 완전고용, 건강 유지와 교육 기회의 공정성 등 여러 사회 보장제도를 강화하여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개혁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혁명을 요구한다고 할 수는 없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기본 원칙으로서의 공정함과 기회 균등은 미국 건국의 원리’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은 미국의 ‘전래의 유산과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의 비판과 제안에 모든 사람의 전폭적인 동의와 지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가 예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견은 그러한 재조정의 속도와 폭 그리고 세부 사항에 대한 것이고, 그가 보여주는 바 민주주의 체제 전체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개혁을 촉구하면서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건국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 이념에 더욱 충실하게 하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 정치에서도 정치적 발전이나 개혁을 말할 때 필요한 것은 격렬한 대결로서의 좌와 우 또는 진보와 보수라는 편가르기보다는 보다 유연한 개념이 아닌가 한다. 지향하는 사회 이상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비전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 전체의 삶에 대한 에토스의 느낌, 즉 거기에 잠재하여 있는 그리고 거기로부터 불러 낼 수 있는 삶의 윤리적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조국 사태는 이러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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