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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없어도 예쁘다…도심 속 오아시스 '성수 가든'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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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0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문을 연 뷰티 체험 공간 ‘아모레 성수’의 백미는 단연 공간 한가운데 조성된 ‘성수 가든’이다. 디귿(ㄷ)자 형태의 건물 가운데 정원을 품고 있는 형태로 꽤 넓은 중정에는 비비추·노루오줌·앵초·한라부추 등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다채로운 식물이 자리잡고 있다. 도심 속 작은 원시림을 만든 '더 가든'의 김봉찬 대표를 만났다. 도시에 자연 그대로의 생태공원을 조성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글=유지연 기자yoo.jiyoen@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아모레퍼시픽, 베케

10일 오픈한 ‘아모레 성수’ 속 정원 만든 #‘더 가든’ 김봉찬 대표 인터뷰

뷰티 체험 공간 '아모레 성수'의 '성수 가든.' 건물 어디에서나 중정의 정원을 볼 수 있도록 설계 됐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뷰티 체험 공간 '아모레 성수'의 '성수 가든.' 건물 어디에서나 중정의 정원을 볼 수 있도록 설계 됐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자동차 정비소였던 아모레 성수의 본래 모습은 여느 성수동 풍경과 마찬가지로 회색빛이었지만, 지금은 도심 속 오아시스인 듯 초록 숲이 자리한 반전의 공간이 됐다. 비결은 한가운데 조성된 정원이다. 도심 건물에 조성된 정원은 많지만 ‘성수 가든’ 만큼 오래된 숲의 감각을 가진 정원은 드물다. 약 231㎡(70여평) 넓이의 작은 이끼부터 이름 모를 풀, 나무들까지 50여 종의 식물이 저마다의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성수 가든을 만든 ‘더 가든’ 김봉찬 대표(54)는 식물학과 생태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생태 정원을 만드는 조경 전문가다. 제주 여미지 식물원에서 근무했고 이후 경기 포천 평강 식물원, 경기 곤지암 화담숲 암석원, 제주 서귀포시 핀크스 비오토피아 생태공원, 경북 봉화 백두대간 수목원 암석원,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 어린이 정원 등을 만들었다. 암석정원, 습지원, 그늘 정원 등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한 자연주의·생태주의 정원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더 가든' 김봉찬 대표. 식물학과 생태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생태 정원을 만드는 조경 전문가다. [사진 표문송]

'더 가든' 김봉찬 대표. 식물학과 생태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생태 정원을 만드는 조경 전문가다. [사진 표문송]

그 중 지난해 제주 서귀포시 신효에 오픈한 ‘베케’는 그의 대표작이다. 설치미술가 최정화 작가와 함께 만든 카페와 정원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마치 동굴처럼 짙은 회색 건물에서 정원을 바라보도록 설계돼 있다. 김 대표는 “최정화 작가와 한국의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다 ‘치밀하게, 엉성하게’라는 얘기가 나왔다”며 “질그릇처럼 완성도는 있지만 투박하고 거친 아름다움을 공간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의 말처럼 제주 베케 정원은 투박하다. 콘크리트를 부순 흔적 위에 풀들이 아무렇게 나 있고, 사방에 흩어진 식물들이 자연스러운 군락을 이룬다. 언뜻 엉성해 보이지만 여기엔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다. 김 대표는 “건물의 육중한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살랑살랑 가벼운 풀이 나타나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 깊은 숲이 보이도록 정원을 설계했다”며 “이끼 정원은 이끼와 풀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춰 땅을 올려 조성했다”고 했다.

제주 서귀포 신효에 위치한 '베케 정원' 중 이끼 정원. 이끼가 있는 돌무덤을 사람의 시선 높이까지 올려 낮은 자세에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 베케]

제주 서귀포 신효에 위치한 '베케 정원' 중 이끼 정원. 이끼가 있는 돌무덤을 사람의 시선 높이까지 올려 낮은 자세에서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 베케]

아름다운 꽃을 심어 놓고 보기 좋게 가꾼 정원은 아니다. 김 대표는 “꽃이 없어도 흑백으로 사진을 찍어도 아름다운 정원”을 추구한다며 “보기 좋게 치장된 정원보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정원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아모레 성수의 성수 가든에서 원시림에 온 듯 정화되는 기분을 느끼고, 베케의 폐허 정원 속에서 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이유다. 자연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몰입하고, 기꺼이 감동할 수 있는 공간. 이른바 생태 정원이다.

제주 베케의 정원. 마치 폐허와 같은 느낌으로 정원을 조성했다. 김봉찬 대표는 "제주 오름의 식생을 반영해 폐허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정원을 만들었다"고 했다. [사진 베케]

제주 베케의 정원. 마치 폐허와 같은 느낌으로 정원을 조성했다. 김봉찬 대표는 "제주 오름의 식생을 반영해 폐허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정원을 만들었다"고 했다. [사진 베케]

김 대표는 “연못을 만들고 갈대를 심는다고 생태 정원은 아니다”라면서 “생물의 다양성, 안정성, 그리고 그들이 맺는 관계를 기반으로 디자인해야 한다”고 했다. 또 “그 기반은 디자인 감각보다는 과학 기술에서 온다”며 “생물들이 살아가는 진짜 공간을 만들어 주고, 그 안에 사는 생물들 각각이 행복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성수 가든 역시 70평 정도의 공간이지만 그 안에 5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다. 김 대표는 “건강한 정원을 만들려면 다양한 식물이 있어야 하는 게 기본”이라며 “미생물이 다양해지면서 안정된 생태계가 만들어지면 해충에도 강하고 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가는 정원이 된다”고 했다.

요즘 도심 속 건물에 정원을 만드는 추세에 대한 조언도 들을 수 있었다. 김 대표는 “공간의 형태와 분위기를 고려한 정원이 만들어져야 한다”며 “공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디자인 감각, 이를 구현하는 기술, 숙련된 전문가 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특히 “건물을 만들고 나서 정원을 조성하기보다, 설계 단계부터 정원을 고려한 건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현대적인 도시에 어떻게 생명을 불러들일 것인가 고민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단순히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란 얘기다. 그러면서 김 대표는 “도시에 숲을 만들겠다고 다짜고짜 큰 나무만 가져다 놓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지적했다. “오래된 아파트에 가면 나무들이 많은데 사실은 죽어있는 숲”이라며 “원시림에는 큰 나무도 필요하지만 작은 이끼도 필요하다. 큰 나무들이 차지한 땅은 뿌리가 꽉 차 있어 나중에 작은 식물을 심었을 때 자라지 않는다. 숲과 정원에 사는 생물을 고려한 좀 더 섬세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마치 원시림의 그것처럼 촉촉함을 지닌 '성수 가든.' 건물 어디에서나 정원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다. 최승식 기자

마치 원시림의 그것처럼 촉촉함을 지닌 '성수 가든.' 건물 어디에서나 정원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다. 최승식 기자

김봉찬 대표는 “사람을 위한 정원, 미세먼지를 해결하기 위한 숲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생물이 행복한 살아있는 숲과 정원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야 그 속에서 사람도 감동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뉴욕의 하이라인’의 예를 들며 “잘 만들어진 도시 정원이 도시를 얼마나 세련되고 품격있게 만드는지,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는지”를 설명했다.

50세가 되면서 김 대표는 알고 있는 기술을 후배들에게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정원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자연에서 공부하는 정원 모임’이다. 1년에 네 번 분기별로 여러 정원을 돌아보며 숲과 정원의 아름다움에 대해 함께 공부한다. 조경 전문가부터 일반인까지 모두 들을 수 있는 투어 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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