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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훈 칼럼

혁명과 반동, 그리고 보수정치의 책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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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훈 기자 중앙일보 주필
최훈 논설주간

최훈 논설주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뭘까. “자본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한다. 그럼 사회주의는. 그 정반대다.” 2차대전 직후 사회주의 정권을 겪은 동유럽의 조크였다고 한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뭘까. “보수는 인간이 인간을 오만과 불통으로 억압하고 지배한다. 그럼 진보는. 그 정반대다.”

‘친박’‘비박’ 한심하던 보수정치 #조국 사태로 마지막 기회 찾아와 #보수지도자, 백의종군·통합으로 #나라와 보수의 재건에 헌신해야

현직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은 피 흘리지 않은 혁명이었다. 혁명! 모든 권력이 보수에서 진보로 쓰나미처럼 넘어갔다. 그해 대선은 그 혁명의 법적 승인 절차였다. 합계 100년이 넘는 징역형이 이른바 구시대(ancien régime)의 적폐 세력에 가해졌다. 다섯 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내달 10일은 문재인 정부, 아니 혁명 정부의 집권 반환점이다. 이쯤 되면 모든 게, 제도와 정치문화와 관행과 서민의 삶이 달라져야 했다. 그러나 조국 사태는 혁명의 대의였던 공정과 정의, 특권과 반칙의 소멸에 치명타를 가했다. 살림살이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지정학적 생존의 버팀목인 동맹과의 관계도 악화된 상황이다. 머리인 지배자가 바뀌었을 뿐 몸은 여전히 권력의 노예 상태인 다수 국민은 일상이 우울할 뿐이다. “초원의 지배자가 사자나 표범이건, 자칼이나 하이에나건… 도대체 사슴과 임팔라들에게 달라진 건 뭔가”란 어느 소설 표현처럼 냉소와 허무가 자연스럽다.

모든 혁명에는 반동(反動)이 따른다. 프랑스혁명 이후 집권한 자코뱅파의 권력자이자 청렴한 지방 변호사 출신인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는 2년 만에 막을 내렸다. “혁명 반대파뿐 아니라 중립인 자들도 처벌한다”는 과격에 수만 여 명이 스러졌다. 혁명의 동지였던 당통마저 타락한 반(反)혁명 분자로 처형하자 적과 우군 모두 등을 돌렸다. 혁명에 열광했던 군중들의 불만은 차디찼다. “과연 혁명 이전과 달라진 게 뭔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다.

반환점에 설 현 정권 역시 ‘테르미도르의 반동’에 직면하고 있다. 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최근 대통령 지지도는 39(한국갤럽)~45%(리얼미터) 수준이다. 여기엔 착시가 있다. ‘이낙연 총리 효과’ 때문이다. 그는 김대중 이후 차기 대선주자 여론 1위를 달리는 사상 유일한 호남 출신 인물이다. 천운도 따른다. 안희정·김경수·이재명에 이어 조국도 스러졌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단언한다. “호남표의 이낙연 기대는 대단하다. 70% 이상이다. 지금 대통령 지지도는 이낙연이 완주하려면 그 토대인 문재인 정부가 무너져선 곤란하다는 염원이 녹아 있다.” 강고한 40% 안팎의 지지층만 유지된다면, 재집권이 가능하다면 정책기조를 바꿀 이유도 약하다.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소득주도 성장, 북한 포용 등 이른바 ‘선의(善意)’에 입각한 정책들은 늘 “달라진 게 뭐냐” “더 나빠졌다”는 반동 보수의 투정에 직면했던 게 역사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탐욕스러운 보수는 늘 찢어져 있을 테니. 내년 초쯤 박근혜도 내보낼 테고…. 할 만 하다. 그냥 간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니 뭐 기대도, 욕할 것도 없다.

그러니 이젠 ‘보수의 시간’이다. 진보진영엔 ‘트로이의 목마’였고, 그들에겐 ‘굴러온 복덩어리’였던 조국 사태 이후부터 내년 4월 총선까지다. 개천절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는 지인의 토로다. “시청역에서 내려 광화문으로 걸어갔다. 우리 공화당 태극기부대는 좀 그렇고…. 한기총 전광훈 목사 집회는 더 과격해 성향이 좀 안 맞고…, 자유한국당 쪽 갔더니 늘 듣던 대통령 욕이나 하고…, 머쓱하게 왔다 갔다 하다 그냥 돌아왔다.” 보수의 현주소다. 변한 게 없으니 20~40대의 보수 정당 지지는 늘 10%대다.

의지할 곳 없어 광장에 발길 끌린 이들에 “내 탓이요”를 되새겨야 할 이들은 보수정치 세력이다. 꼬락서니는 그러나 가관이다. 혁명을 부른 ‘원죄(原罪)’에의 통렬한 반성은커녕 아직도 ‘친박’ ‘비박’ 타령이다. 쓰나미가 흔적도 없이 훑고 간 마을에서 ‘내 터’ ‘네 터’ 따지는 꼴이다.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부활이라도 기대하는 건가. 박정희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권까지 보수를 숙주로 성장해 온 정치인들 모두 “내가 왕년에…”를 이젠 내려놓으라. 그리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 황교안·나경원·유승민·홍준표·오세훈·손학규는 물론 무슨 일 있느냐는 듯 마라톤 체력 관리 중인 ‘중도 보수’ 안철수까지…. 자신을 내려놓고 미래와 희망에 기여·헌신해야 할 때다. 언제까지 사람들을 광장으로만 내몰 건가. 지금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씻지 못할 ‘역사의 죄인’일 뿐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조국 덕에 마지막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다. 채 6개월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 지방선거까지 최대 55~60%까지 이르던 진보정치 지지가 40%대로 떨어져 있다. 30% 정도의 중도가 숨을 고르고 있다. 젊은 보수의 활력이 중도를 견인할 힘이다. 5·18 망언, 종북몰이, 성장만이 살 길 유의 수구꼴통 답변지론 곤란하다. 헛심만 쓸 ‘남 탓’보다 ‘혁명 이후 새 대한민국’ 청사진을 스스로 제시하라.

프랑스혁명은 반동을 거쳐 엉뚱한 포병 대위 출신이 대미를 장악했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지금의 진보나 보수 정치나 기다리는 건 공멸(共滅)뿐이다.

최훈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