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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대통령 한마디에 졸속 입시 개편, 학생과 교육만 멍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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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교육 분야에서 신뢰는 매우 중요하다. 국민은 그동안 교육에 대한 정치의 과잉 개입, 이념에 좌우되는 교육, 잦은 제도 변화에 염증을 느껴왔다. 좋은 교육이 이뤄지려면 학생과 교사, 학부모와 학교, 학교와 교육청 사이에 믿음이 필요하다. 즉흥적인 판단으로 섣불리 내던지고 뒷수습에 급급해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한번 신뢰를 잃으면 국민은 각자도생에 나서고 백약이 무효가 된다. 그래서 정책 발표는 신중해야 하고, 일단 시행하면 최대한 지키려는 모습을 보일 때 믿음이 생긴다.

조국 자녀 의혹 와중에 급히 추진 #교육 개혁은 체계적 검증 거쳐야

그런 면에서 최근 문재인 대통령 지시 한마디에 따라 추진 중인 대입 제도 개편은 우려스럽다. 급기야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자사고·외국어고·국제고를 2025년부터 일반고로 일괄 전환한다는 방침을 비공개로 정했다고 한다.

그동안 정부가 교육 정책만큼은 중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안정적으로 가져가겠다고 했던 약속을 위반한 셈이다. 지난해 우리는 대입제도 공론화라는 명목으로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엊그제 바꾼 제도를 또다시 손보면 연년생 자녀를 둔 가정은 매년 다른 입시를 치러야 한다. 이래서야 어떻게 정부 정책을 신뢰하겠나. 앞으로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해도 대통령 지시 한 번이면 하루아침에 정책이 바뀔 수 있다는 나쁜 선례도 남겼다.

대입제도라는 중요한 정책을 바꾸는 발단이 비교육적이고 절차 또한 의문이다. 교육 개혁은 과학적 분석과 체계적 검증,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치열한 논의를 거쳐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입 제도 개편 움직임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의혹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 속에 촉발됐다. 개혁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다. 국민의 불만을 잠시 누그러뜨리는 해법은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고려로 졸속 추진된 정책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피상적 조치와 미봉책에 그쳤던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대입에서 공정성은 중요한 의제다. 그러나 입시에서 공정과 정의는 주관적인 해석이 불가피하고 집단 간 다툼을 불러오는 정치적인 이슈다. 다른 모든 이슈를 삼키는 블랙홀이 된다. 그런 탓인지 지금의 논의를 보면 형식적 공정성의 잣대에 매달려 학교 교육이나 대입 제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리는 모습이다. 동아리, 봉사, 진로 활동 등 비교과 영역의 학생부 기재를 대폭 줄일 수도 있다는데, 자칫하면 학생의 잠재력과 노력을 살피는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의 본질까지 훼손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미래 교육 방향에 대한 논의가 실종되고 있다는 것이다. 13개 대학을 대상으로 입시 공정성이라는 명목으로 과거를 뒤진다고 한다. 차라리 대학을 모아 놓고 미래 교육 방향, 고교 교육과 대학 연계, 이를 지원하는 입시 제도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장을 펼치면 어떨까.

마지막으로 대통령 말씀의 무게와 깊이에 대한 것이다. 강력한 대통령제에서 대통령 지시는 절대적이다.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단편적 지시는 문제를 낳는다. 대입 제도 개편 방안은 2025년까지 전면 도입하는 고교 학점제, 특목고와 자사고 폐지 여부가 달린 고교 체제 개편, 학령인구 감소와 대입 경쟁률 하락 추세 등 정책 생태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마련해야 한다.

학종만 살짝 손봐서 될 일이 아니다. 게다가 조국 자녀 입시 문제는 10년 전 일인데, 그동안 보완을 거듭해서 다듬어진 현재 제도를 바꾸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오죽하면 전교조조차 대통령의 대입제도 재검토 발언이 경솔했다고 비판했을까. 교육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정부가 큰 틀에서 정책적 신뢰를 잃고, 전문성마저 의심받는다면 국민은 누굴 믿고 따르겠나.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