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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오디션 조작 의혹, 공정성 판타지도 무너뜨리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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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

케이블 채널 엠넷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X 101’(이하 프듀X)의 생방송 투표 조작 의혹이 제기됐다. 경찰은 CJ ENM 소속 엠넷 프듀X 제작진 사무실, 문자 투표 데이터 보관업체뿐 아니라 이 오디션을 통해 만들어진 그룹 ‘엑스원’의 멤버 소속사까지 압수수색했다.

‘프로듀스 X 101’ 투표 조작 수사 #경찰 명백하게 시시비비 가려야

이번 의혹은 지난 4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통신위원회 국감장에서도 이슈가 됐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사건에 대해 “방송계 일각에서 쉬쉬했던 것이 터졌다”고 공정성 문제를 지적했다.그날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투표 조작 논란이) 오랫동안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데이터만 보더라도 투표 조작 의혹이 충분히 예상된다”고 답변했다.

이번 의혹은 마지막 생방송 경연에서 시청자들의 유료 문자 투표 결과에 의외의 인물들이 데뷔 조에 포함되면서 불거졌다. 물론 이런 투표 결과에 대한 불만은 늘 오디션 프로그램에 존재해왔다. 하지만 이 사안이 사건화된 건 1위에서 20위까지 득표 숫자가 모두 ‘7494.442’라는 특정 숫자의 배수라는 팬들의 분석이 나오면서다. 의혹에 구체적인 숫자가 제시되면서 논란은 일파만파 커졌다. 팬들은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엠넷을 고발했고,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수사에 들어갔다.

MBC ‘PD수첩’에 따르면 참가자 중 일부는 이미 탈락 여부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제작진의 개입은 물론이고 기획사와의 유착 의혹도 제기됐다. ‘아이돌 학교’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연습생들은 심지어 인권 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직 수사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불공정한 개입이 있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사실 ‘슈퍼스타K’(엠넷)부터 지금껏 오디션 프로그램이 한국 사회에서 특히 화제가 되고 인기가 높았던 건 공정하지 못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즉 출발부터 다를 수밖에 없어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대중에게 오디션 프로그램은 오로지 실력으로만 판단한다는 ‘공정성의 판타지’를 제공했다. ‘슈퍼스타K2’에서 환풍기 수리공이었던 허각(34)이 우승자가 되면서 만들어낸 신드롬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매번 심사 결과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이어졌다. 프듀X는 이른바 ‘국민 프로듀서’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심사위원이 뽑는 게 아니라 시청자 투표로 직접 뽑는 경쟁 시스템을 새로운 룰로 제시했다. ‘국민 프로듀서님’이라 불리며 투표한 시청자들은 자기 손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뽑아 성장시키는 짜릿한 경험을 했다. 육성 개념까지 들어간 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팬덤은 더 견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이 팬덤의 근간이 되는 공정성의 판타지를 무너뜨렸다. 프로그램 제작진과 연예기획사 사이에 유착 관계가 수사의 대상이 된 사실만으로도 팬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팬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좋아하는 아이돌을 뽑고 성장시킨다고 여겨왔지만, 그것이 허울뿐인 착각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투표는 물론이고,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개인 비용을 들여 경품까지 내걸었던 팬들이 아니었던가.

항간에는 취업 사기라는 말까지 나온다. 똑같이 노력했지만 이미 정해진 판에서 들러리가 된 상황이 마치 지금 청춘들이 처한 취업 현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번 사태가 사기와 유착으로 나중에 최종 판명된다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불공정한 현실 때문에 공정함의 판타지에 빠져들었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조차 불공정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충격이 클 것이다.

이번 사태를 훨씬 더 엄정하게 수사하고 명명백백하게 시시비비를 가려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