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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중화부흥은 ‘정무문’ ‘황비홍’ ‘엽문’의 결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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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중국 무협영화로 본 민족 치욕의 청산 방식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건국 70주년 경축 만찬 자리에서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빛나는 미래’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건국 100년을 맞는 2049년까지 중국공산당과 중국 정부의 임무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원래부터 중국 공산당의 정체성과 주요 임무는 아니었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후 1980∼90년대에 중국공산당이 강조한 것은 ‘민족진흥(民族振興)’이었다. 민족진흥은 일찍이 쑨원(孫文)부터 사용된 현대 중국 정치사의 핵심 키워드였다. 장쩌민(江澤民) 시대 말기인 2001년부터 중국공산당은 ‘민족진흥’이라는 개념 대신에 ‘민족부흥’이란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소룡이 ‘동아병부’ 액자 박살 내는 #‘정무문’ 장면은 힘의 복수를 상징 #개방 시대 ‘황비홍’은 현대화 강조 #‘엽문’은 전통 문화 우월성 대변

‘민족진흥’과 ‘민족부흥’ 두 개념은 중국을 강하고 발전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역사인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 부흥은 글자 그대로 쇠퇴에서 벗어나서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를 지닌다. 발전을 넘어서 기어이 전통시대처럼 세계 중심국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중심국가였던 중국이 근대 아편전쟁이후 1949년 사회주의 중국 수립 때까지 이른바 ‘치욕의 100년’을 겪으면서 세계사의 주변국가로 전락하였지만, 이제 다시 과거처럼 세계중심국가로 되돌아가겠다는 역사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요컨대 ‘전통시대 세계 중심국가 → 근대 민족적 치욕 → 21세기 세계 중심국가로 복귀’로 연결되는 역사인식이다.

이 연결고리 속에서는 민족부흥이 강조될수록 전통 중국의 위대함과 근대 중국이 겪은 치욕 기억 역시 강조되기 마련이다. 사실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에 중국공산당은 중국 근대의 치욕 기억을 강조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에 당한 치욕 기억보다는 중국이 제국주의에 승리한 기억을 강조했다. 그런데 민족부흥이 강조되면서 “민족의 치욕을 잊지 말라(勿忘國恥)”는 구호가 부상하고 있다. 민족부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근대 중국이 겪은 민족 치욕 기억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민족부흥이 곧 치욕 청산의 방법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무협 영화 키워드는 치욕과 복수

위쪽부터 ‘정무문’ ‘황비홍’ ‘엽문’ ‘무인 곽원갑’.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위쪽부터 ‘정무문’ ‘황비홍’ ‘엽문’ ‘무인 곽원갑’.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민족부흥 정책과 더불어 근대 치욕 기억이 부상하고 있지만, 근대 치욕 기억과 그 치욕에 대한 복수 이야기는 중국인에게는 익숙하다. 중국 무협영화의 단골소재였고 늘 인기였다. 유명한 ‘정무문’과 ‘황비홍’ 시리즈, 그리고 ‘엽문’과 ‘곽원갑’ 시리즈는 모두 근대 치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들 영화는 근대 치욕 기억을 통해 대중들의 민족주의 정서를 지속적으로 생산해왔는데, 이제 중국공산당이 중국민족의 부흥을 외치면서 다시 치욕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

근대 치욕을 다룬 무협 영화는 대부분 치욕과 복수를 키워드로 삼고 있지만 치욕 청산의 방법은 각각 다르다. 그 중에는 중국공산당의 방법과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영화 속 치욕 청산 유형을 대표작 중심으로 나눌 때 가장 대표적인 영화가 리샤오룽(李小龍), 즉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1972)이다. 이 영화에서 치욕 청산 방법은 힘이다. 주인공 천전(陳眞·진진)은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에 힘으로 맞서서 제압한다. 천전은 근육을 과시하면서 발차기로 동아시아의 병든 환자라는 뜻의 ‘동아병부(東亞病夫)’ 액자를 박살낸다. 이른바 ‘근육 민족주의’(muscular nationalism)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여 힘의 복수를 통해 치욕을 청산하는 방법이다.

‘황비홍’(1991) 유형의 치욕 청산 방법은 현대화를 통한 자기변화다. 이번에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 악의 화신인데 한의사이기도 한 황비홍은 중체서용의 방법을 택한다. 서구에는 황금의 산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작품 마지막에 황페이훙(黃飛鴻·황비홍)은 양복을 입고 등장한다. 1990년대 초반 미·중 대립 속에서 현대화를 추구하는 중국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 구상을 여실히 반영한 치욕 청산 방법을 담은 영화는 ‘엽문’(2008)이다. 베이징 올림픽이 열린 2008년 중국에서 최고 흥행을 기록한 이 영화에서 치욕 청산 방법은 중국 전통정신과 중국문화의 힘이다. 영화에서 예원(葉問·엽문)은 ‘정무문’에 나오는 리샤오룽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스승 예원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제자 리샤오룽과 다르다. 일본에게 천전은 중국 힘의 상징이었지만 예원은 중국문화의 상징이다. 예원은 그의 무술실력을 본 일본 장교가 이름을 묻자 “나는 중국인이다”고 답한다. 그런가하면 일본군에게 무술을 가르치라고 하자 예원은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仁)을 모르기 때문에 일본인은 무술을 배울 수 없다.” 여기서 예원의 무술은 힘의 상징이 아니라 유교정신과 중국문화의 상징이다.

중국에 필요한 건 ‘곽원갑’의 자기 성찰

앞의 영화와 구별되는 치욕 청산 방법을 다룬 영화는 ‘무인 곽원갑’(2006)이다. 이 영화에서 치욕 청산의 방법은 복수의 사슬을 끊는 것이다. 소싯적 훠위안자(霍元甲·곽원갑)은 오직 힘만 믿었지만, 죽음의 경지에서 소수민족에게 구출되어 거기서 살고 난 뒤 달라졌다. 독약까지 쓰는 일본과 서양을 상대하는 훠위안자는, 경기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진정한 경쟁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복수하겠다는 제자들에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면서 말린다. 치욕 이야기의 원조인 와신상담 고사에서 보듯 치욕은 복수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훠위안자는 치욕을 가한 상대를 의식하지 말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복수라는 개념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치욕 극복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중화민족을 부흥시키겠다는 지금 중국공산당의 치욕 청산 방법은 ‘정무문’과 ‘황비홍’그리고 ‘엽문’의 방식이 결합되어 있다. 힘 있는 강국, 유교와 전통문화 정신의 복원, 현대화를 넘어 첨단산업으로 선진국 중국을 실현하는 전략 등에서 그렇다. 하지만 ‘무인 곽원갑’과 같은 성찰은 부족하다. 치욕을 가한 서구와 일본을 늘 경쟁자로 의식하는 가운데 자기 목표를 설정한다. 그러나 중국에 우선되어야 할 것은 중국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다. 진정한 경쟁자는 서구가 아니라 중국 자신이다. 중국 민족주의 차원에서는 근대 치욕을 씻고 세계중심국가로 복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적 견지에서는 정의롭고 선한 중국이 더 중요하다. 세계중심국가가 되려면 중국이 반드시 새겨야 할 점이다. 중국이 중심국가가 되는 것이 세계가 또다시 재앙을 반복하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

‘정무문’=뤄웨이 감독, 리샤오룽(이소룡) 주연의 1972년작. 쌍절곤 권법을 펼친 리샤오룽을 브루스 리란 서양식 이름으로 세계적 스타로 만든 대표작.  20세기초 상하이를 배경으로 주인공 천전이 일본계 무술도장에 의한 스승 훠위안자(곽원갑)의 죽음에 복수하는 내용의 줄거리다.

‘황비홍’=쉬커 감독 리롄제 주연의 1991년작. 청말 민국 초기의 전설적인 무술가이자 의사였던 황페이훙(황비홍)의 일대기를 소재로 했으며 이후 연작으로 제작되었다.

‘엽문’=2008년 작. 예웨이신 감독, 전쯔단 주연. 리샤오룽(이소룡)의 사부이며 영춘권의 대가로 알려진 실존 인물 예원(엽문)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무인 곽원갑’=2006년작. 위런타이 감독, 리롄제 주연. 청 말기의 실존 인물인 훠위안자(곽원갑)의 무협 역정을 그린 영화. 리롄제는  이 영화를 끝으로 액션 영화에는 더 이상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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