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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걸려도 자식에 재산 안맡긴다···전문후견인 찾는 노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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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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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려도 내 재산은 자식한테 안 맡기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성년후견 문제와 관련해 변호사 사무실에 상담을 받으러 온 노인들이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나이가 들며 치매나 사고 등 건강상의 문제로 성년후견인을 선임하는 건수가 늘고 있지만, 대다수가 자식과 같은 친족을 후견인으로 지정해 최근에는 ‘후견인이 사고 치는 사건’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횡령이다.
피후견인의 재산을 후견인들이 빼돌려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지난 2017년 제주지법은 성년후견제가 도입된 이후 최초로 사고로 뇌변병 장애를 겪는 피후견인인 동생의 재산 1억4000만원을 가로챈 후견인 형에게 징역 8월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성년후견인이라면 ‘친족상도례’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친족상도례는 부부나 부모-자식 등 가까운 혈족 사이에는 절도 등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규정이다.

"피후견인 재산은 눈먼 돈이라는 인식 늘어"   

법무법인 정원의 송인규 대표변호사는 “현재 성년후견인의 대부분이 친족후견인이다 보니 그들의 횡령·배임 사건도 늘어나고 있다”며 “예를 들어 자녀 입장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다 보면 그 돈을 ‘눈먼 돈’으로 인식해 자신을 위해 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친족후견인 스스로도 횡령이나 배임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피후견인의 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녀 중 한 명이 후견인이 될 경우 가족 간 분쟁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다른 자녀들이 피후견인의 재산 사용에 개입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성년후견인으로 선임된 김모(54)씨는 “동생들이 맨 처음에는 성년후견인이 아버지를 모시기만 할 뿐, 크게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며 “최근 아버지 명의의 재산을 처분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동생들의 ‘어디다 돈을 쓰냐’는 지적과 ‘좀 나눠 달라’는 요구가 계속돼 골치 아프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율촌의 김성우 변호사는 “친족후견인은 피후견인과의 정서적인 교류에 좋고, 그 사람에게 딱 맞는 후견 사무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하지만 같이 생활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피후견인의 재산과 자신의 재산을 혼동할 여지가 있고, 친족후견인이 후견인이 되면 밖에서 들여다볼 사람이 없어서 횡령이나 학대가 있을 때 쉽게 알려지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재산은 전문가에, 신변은 자녀에…공동후견인 늘어 

증가하는 전문후견인 접수 건수,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증가하는 전문후견인 접수 건수,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이 때문에 최근 성년후견의 ‘트렌드’로 공동후견인이 많아지는 추세다. 공동후견인이란 말 그대로 2인 이상이 후견인이 되는 형태다.
이는 재산 분쟁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난 영향도 있다. 재산 분쟁을 겪는 피후견인의 경우 한 명의 친족이 오롯이 그의 후견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후견인은 법원에서 지정해주는데, 친족끼리 피후견인의 재산을 놓고 다투거나 한 명이 성년후견인이 될 것을 반대할 때는 법원에서 후견인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두 명 이상의 자녀가 공동으로 후견인으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이 경우 한 사람의 후견인이 마음대로 피후견인의 재산을 처분해서 사용하는 등 횡령·배임 범죄를 저지르기 어렵다.

최근에는 재산 관리는 전문가가, 신상 관리는 친족에게 맡기는 공동 후견 제도도 늘어나는 추세다. 아예 분쟁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재산 분야는 변호사나 회계사 등 전문가에게 일임하고, 노인의 신상 문제나 복지 등 가족이 신경 쓰는 게 더 적합한 부분은 친족후견인이 담당하는 것이다. 이 경우 친족후견인은 피후견인의 재산 중에 소정의 ‘돌봄비’를 전문가후견인을 통해 제공받을 수 있다.

송인규 변호사는 “전문가후견인은 ‘보수가 든다’는 이유 등으로 아직까지 매우 적은 수가 선임되고 있지만, 최근 재산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고령화사회가 될수록 전문가후견인 또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공후견인이 늘어 후견 업무가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게 좋다”고 말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전체 후견인 중 절반가량이 전문가후견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피후견인의 재산을 신탁은행 형태로 보관해두고 매달 은행이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다. 일본도 성년후견제 도입 초기에 후견인의 횡령 사건이 많아 이 같은 제도가 마련됐다. 우리나라도 아예 법무법인이나 후견 전문 기관을 후견인으로 선임하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 한 자리 수에 그칠 정도로 매우 적다.

"치매 전 후견인 지정" 임의후견도 관심 

아예 치매에 걸리기 전 미리 후견인 계약을 맺는 ‘임의후견’에 대한 관심사도 늘어나고 있다. 성년후견은 피후견인인 노인이 심신미약 등의 상태일 때 후견인이 법원에 ‘후견을 하겠다’고 신청하는 형태인데, 임의후견은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피후견인이 ‘내가 이런 사람을 후견인으로 선임하겠다’고 요청하는 것이다. 김성우 변호사는 “정신이 멀쩡할 때 자신의 의사대로 후견인을 선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임의후견이 가장 피후견인의 요구를 반영한 후견 형태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임의후견도 악용 사례가 있다. 이미 치매에 걸린 피후견인인데 ‘멀쩡하다’고 하면서 후견인의 의사대로 임의후견 계약을 체결하는 형태다. 친족 등 후견인이 의도를 갖고 피후견인을 조종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임의후견이 활성화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전문가들은 ‘치매 이후를 준비하지 않는 문화’를 꼽았다. 김성우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유언장 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미리 ‘나쁜’ 무언가를 대비하는 것에 대해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고령화사회에 접어든 만큼 스스로 당연히 대비해야 할 것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와 재산을 가장 제대로 지키는 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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