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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의 삽질일기] 누구의 손일까, 직업을 맞춰보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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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호 면

평창에 가면 어디에나 구절초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웬 걸 한참을 걸어도 보이지 않았다. 코스모스만 지천이었다. 운 좋게 한 포기를 만나니 반가웠다.

평창에 가면 어디에나 구절초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웬 걸 한참을 걸어도 보이지 않았다. 코스모스만 지천이었다. 운 좋게 한 포기를 만나니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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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하며 이게 뭐지 했다. 돌덩이를 잡은 느낌이었다. 손을 당겨 잡고 살펴보았다. 손가락이 나보다 두 배는 굵다. 엄지와 검지 사이 홈에 깊이 박인 굳은살이, 맨발로 다니는 사람의 뒤꿈치처럼 갈라져 있다. 두툼한 손바닥은 뜨거운 냄비를 올려놓아도 되겠다. 풀로만목장 대표 조영현의 손이다.
광화문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인데, 전라남도 장흥에서 소를 키운다. 미국 건초를 수입하며 세계를 누볐다. 들에서 풀 뜯으면 자라는 소를 가둬놓고 배합사료로 키우는 관행을 ‘몹쓸 짓’이라고 생각한다. 소는 소답게 키워야 한다는 말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 하며 직접 뛰어들었다. 연고 하나 없는 땅끝 마을로 내려갔다.

 "소를 더 빨리, 더 크게 키워 1++등급 받는 일이 축산의 목적이 됐어요. 곡물 배합사료를 먹이는 이유지요. 소는 위가 4개예요. 풀을 먹어야 하는 데 옥수수 같은 곡물 사료를 써서 강제로 기름기를 만들지요. 마블링이 많은 소는 건강하지 않다는 증거예요. 제 농장에서 자라는 소는 어미 뱃속에서부터 나가는 날까지 목초만 먹지요. 저는 기존 등급제에 관심 없어요.”

내년이면 10년이다. 새벽 5시면 눈을 뜬다. 축사와 물통을 청소하고, 오전 6시 30분과 11시 30분, 오후 5시 30분, 하루 3번 알팔파와 라이그라스로 소밥을 준다. 90마리 먹을 풀을 넣는데 한 번에 2시간 30분이 걸린다. 축사 안에서만 하루 1만2000보쯤 걷는다. 오로지 일하며 걷는 이 시간 동안 빗자루나 쇠스랑이 손에 자석처럼 붙어 다닌다. 빗자루는 끝이 닳고 손끝도 같이 달아 지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명품 뒤에는 우직한 손이 있다.

2년 전에 찍어놓은 조영현 대표의 손 사진을 찾지 못해 직접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내 의도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찍었다. 엄지손가락 안쪽 굳은살은 빗자루가 찍어준 도장이다. 소가 배불리 먹고 남은 건초는 다시 비로 쓸어 치운다. 목장에서는 소가 상전이다.

2년 전에 찍어놓은 조영현 대표의 손 사진을 찾지 못해 직접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내 의도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찍었다. 엄지손가락 안쪽 굳은살은 빗자루가 찍어준 도장이다. 소가 배불리 먹고 남은 건초는 다시 비로 쓸어 치운다. 목장에서는 소가 상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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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집에서 우연히 손을 봤다. 오른손 중지가 활처럼 휘었다. 사고를 당했나, 선천적으로 그런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실례될까 해서 물어보지 않았는데 그럴수록 더 궁금해졌다. 퍼뜩 짚이는 게 있어 혹시… 했더니 역시 그랬다.
화가 이미경, 펜으로 그림을 그린다. 사라져가는 것들, 그중에서도 구멍가게 그림에 천착한다.

“…왕조의 유물,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상징물보다 나를 더 강렬히 잡아끄는 것은 보통의 삶에 깃든 소소한 이야기다. 사람 냄새나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나는 낯설다. 그저 동시대의 소박한 일상이나 사람과 희망에 의지하여 오늘도 작업에 임할 뿐이다. 정겨운 구멍가게, 엄마의 품, 반짇고리 같이 잊고 있던 소중한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화가의 책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중에서)

바다수퍼, 친절슈퍼, 복희슈퍼, 만화수퍼, 와흘상회, 남문점빵, 삼거리 슈퍼, 봉평상회… 그림 속 가게들은 이름만으로도 푸근하다. 펜화는 고행이다.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면 막막하다. 저 넓은 바다를 언제 다 채우나 한숨부터 나온다. 요행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의자와 한 몸이 돼 한 땀 한 땀 그리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보통 10시간, 많을 땐 15시간씩 그린다. 그렇게 20여년, 펜대를 지지하는 손가락은 점점 밖으로 휘었다. 저녁이면 손가락을 구부릴 수 없을 만큼 아프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뼈가 휘는 노력은 뼈를 깎는 노력의 다른 말이다.
작가는 못생겼다고 손을 감춘다. 못생기기는커녕 국보급이다. 노동의 훈장이다.

가운데 손가락이 활처럼 휜 화가 이미경의 손. 땀 냄새 물씬 난다. 노동의 기록이다. 작년에 만났을 때 하도 인상에 깊이 남아서 내손과 나란히 놓고 찍은 사진이 있다. 그런데 작가 혼자만의 사진이 없다. 구멍가게 그림을 배경에 넣어 하나 찍어 달라고 해서 받았다. 부끄럽다고 했지만 부끄럽지 않는 손.

가운데 손가락이 활처럼 휜 화가 이미경의 손. 땀 냄새 물씬 난다. 노동의 기록이다. 작년에 만났을 때 하도 인상에 깊이 남아서 내손과 나란히 놓고 찍은 사진이 있다. 그런데 작가 혼자만의 사진이 없다. 구멍가게 그림을 배경에 넣어 하나 찍어 달라고 해서 받았다. 부끄럽다고 했지만 부끄럽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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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길 선장은 바다가 고향이다. 원양어선을 타고 모든 바다를 돌았다. 평생을 파도 위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체험한 바다를 틈틈이 활자로 기록해 시인으로 소설가로도 등단했다. 이제는 국제옵서버로 일한다. 어업활동 감시·감독과 과학조사가 임무다. 그가 SNS에 올린 손 사진 한장에 꽂혀 한동안 멍했다. 7월 7일 오후 9시 남태평양 다랑어연승선에서 찍은 사진이다. 주인공이 대체 누굴까 궁금해 물어봤다.

“액션캠을 들고 있었는데 내 얼굴 앞으로 손을 내밀어요. 순간 이건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니윌, 서른여섯 먹은 인도네시아 선원입니다. 잡아 올 린 다랑어를 처리해요. 한국 다랑어 어선은 이번이 다섯 번째지요. 1어기를 2년 6개월 정도로 보면 배 탄 경력이 15년쯤 되네요. 처음에는 평선원으로 다랑어 낚싯줄을 다루다가 두 번째 승선부터 다랑어 처리만 해왔습니다. 뱃일은 극한직업이지요. 이날은 오후 4시에 시작한 고기잡이가 다음 날 오전 8시가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맨손이 바닷물에 계속 젖어 있었지요. 다랑어 처리에는 섬세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손가락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지 못해요. 그러니 손바닥이 온통 굳은살로 뒤덮이지요. 두 아이의 아버지로, 남편으로, 그리고 부모의 아들로 살아가는 깨끗한 손입니다”

다랑어잡이 원양어선을 탄 인도네시아 선원 니윌의 손. 잔금이 뭉개진 손바닥이 물에 불어 허옇다. 손가락 끝은 갈라지고 터졌다. 그의 힘은 고향에 있는 가족이다.

다랑어잡이 원양어선을 탄 인도네시아 선원 니윌의 손. 잔금이 뭉개진 손바닥이 물에 불어 허옇다. 손가락 끝은 갈라지고 터졌다. 그의 힘은 고향에 있는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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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영래 변호사가 1983년에 쓴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다 보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참혹한 노동의 시대였다.

“어느 날 한 미싱사 처녀가 일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 왈칵 토해내었다. 각혈이었다. 태일이 급히 돈을 걷어서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였다. 평화시장의 직업병 가운데 하나였다. 그 여공은 해고당하고 말았다. 각혈을 한 여공은 평화시장 생활 몇 년에 그동안 번 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고치기 어려운 병만 얻고 거리로 쫓겨났다”

60년대, 창문도 없는 닭장 같은 공장에서 14시간 넘게 일하며 받는 월급이 1500원이었다. 쉬지 않고 일해도 하루 일당이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50원이다. 하숙비가 하루 120원이었다. 미싱사들은 손목 통증이 심해 밥 시간에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했다. 닳고 닳아 지문이 없어진 손가락 끝을 누르면  피가 솟았다.

심심찮게 비가 내려 이번 가을은 흙이 마를 새가 없다. 그런데도 몇몇 밭은 자꾸 물을 준다. 배가 불러 죽겠다는 데도 먹이고 또 먹이는 셈인데,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심심찮게 비가 내려 이번 가을은 흙이 마를 새가 없다. 그런데도 몇몇 밭은 자꾸 물을 준다. 배가 불러 죽겠다는 데도 먹이고 또 먹이는 셈인데,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말 같지 않은 말이 판치는 말할 수 없이 삭막한 오늘, 노동하는 손은 정직하다. 밭에서 풀을 뽑고 북을 주다가 이런저런 손이 생각났다. 내 손을 내려다보니 좀스럽고 쩨쩨하다.
다가오는 추위를 눈치챘는지 배추는 겉잎을 오므리기 시작했다.

쌈거리 사이에서 자라는 곰보배추. 설마 봄에 뿌린 씨가 이제 싹이 트는 건 아닐 테고. 개미들이 유독 좋아해서 뿌리 근처에 집을 짓고 산다.

쌈거리 사이에서 자라는 곰보배추. 설마 봄에 뿌린 씨가 이제 싹이 트는 건 아닐 테고. 개미들이 유독 좋아해서 뿌리 근처에 집을 짓고 산다.

아욱 잎 가운데 처박혀 꼼짝 않는 달팽이. 얘, 햇살 퍼지면 목마르니 그만 정신차려.

아욱 잎 가운데 처박혀 꼼짝 않는 달팽이. 얘, 햇살 퍼지면 목마르니 그만 정신차려.

밭둑의 부추. 베어내지 않았더니 대공이 굵직하다. 봄에 쥔장이 약을 세계 친 자리라 보고만 있다.

밭둑의 부추. 베어내지 않았더니 대공이 굵직하다. 봄에 쥔장이 약을 세계 친 자리라 보고만 있다.

가운데 줄이 열무다. 거름을 하지 않아 잎이 연한 녹색이다. 자연 상태로 자라는 채소는 색깔이 진하지 않다. 저 뒤 진록의 배추는 속이 차기 시작했다.

가운데 줄이 열무다. 거름을 하지 않아 잎이 연한 녹색이다. 자연 상태로 자라는 채소는 색깔이 진하지 않다. 저 뒤 진록의 배추는 속이 차기 시작했다.

옆밭의 늙은 오이. 거두지를 않아 썩어가고 있다. 아까워라.

옆밭의 늙은 오이. 거두지를 않아 썩어가고 있다. 아까워라.

베짱이인가. 배춧잎에 구멍 내놓고도 모자라 똥까지 싸고 튄 놈은 얘가 아니고 배추벌레.

베짱이인가. 배춧잎에 구멍 내놓고도 모자라 똥까지 싸고 튄 놈은 얘가 아니고 배추벌레.

가지는 1번은 더 딸 수 있겠고 고추는 올 마지막 수확. 가지 앞에는 민들레.

가지는 1번은 더 딸 수 있겠고 고추는 올 마지막 수확. 가지 앞에는 민들레.

괭이밥이 낮은 포복을 하며 꽃을 피운다.

괭이밥이 낮은 포복을 하며 꽃을 피운다.

봄에 밭을 덮었던 별꽃도 다시 피고. 구름이 잔뜩 낀 날 아침이라 사진이 영 시원찮다.

봄에 밭을 덮었던 별꽃도 다시 피고. 구름이 잔뜩 낀 날 아침이라 사진이 영 시원찮다.

여뀌. 가까이 보아야 예쁜데 가까이 갈수록 보이지 않으니 난감하다.

여뀌. 가까이 보아야 예쁜데 가까이 갈수록 보이지 않으니 난감하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 모양이냐. 잎은 무성한데 몸통은 아직 청소년인 무.

내가 뭘 잘못해서 이 모양이냐. 잎은 무성한데 몸통은 아직 청소년인 무.

잠깐 뜯었는데 고수가 한줌. 손에 밴 향이 오래 남았다. 쿰쿰한 냄새 나는 차 안도 고수 잎 몇장이면 깔끔.

잠깐 뜯었는데 고수가 한줌. 손에 밴 향이 오래 남았다. 쿰쿰한 냄새 나는 차 안도 고수 잎 몇장이면 깔끔.

상추가 꽃 한 송이 귀에 꽂고, 또 한 송이 입에 물고, 강남역 사거리를 돌아다니면 뭘 좀 아는 아저씨라고 칭찬받을 거야.

상추가 꽃 한 송이 귀에 꽂고, 또 한 송이 입에 물고, 강남역 사거리를 돌아다니면 뭘 좀 아는 아저씨라고 칭찬받을 거야.

밤에는 추워 죽겠는데 주인아저씨가 히터를 안 틀어주지 뭐야. 햇살 향해 목을 길게 뺀 여주꽃.

밤에는 추워 죽겠는데 주인아저씨가 히터를 안 틀어주지 뭐야. 햇살 향해 목을 길게 뺀 여주꽃.

그림·글·사진=안충기 아트전문기자 newnew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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