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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 曰] 소음 불통의 시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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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호 30면

홍병기 경제전문기자

홍병기 경제전문기자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거대한 몸체를 지녔으면서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존재가 바로 고래다. 어둡고 침침한 바닷속에서만 살다 보니 시각과 후각 대신 청각에 의존해 진화했다.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낮은 주파수를 마치 노래처럼 내뱉는 소리가 고래들 사이에 의사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드넓은 심해 속에선 저주파가 거의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1만5000㎞나 떨어져 있어도 상호 간의 소통이 가능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깊은 바다의 주인으로 살아오던 고래들에게 19세기 이후 증기선의 등장은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바닷 속 침묵 강요한 인간 소음처럼 #민심 앞세우면 사회 소통 가로 막혀

상선과 군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갖가지 소음이 고래들의 자유로운 소통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인간이 만든 소음으로 대양을 가로질러 소통하던 고래들은 심각한 장애를 일으켰고, 서로의 교신 거리가 점점 짧아지면서 사회적 관계는 단절돼 갔다.

칼 세이건의 역작 『코스모스』에 나오는 대목이다. 인류 문명의 이기적 욕심이 가져온 부작용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소음을 해양 생태계에서 건강한 소통을 가로막은 걸림돌로 꼽았다. 새로운 문명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적인 평가 뒤엔 고래의 말길을 퇴화시켜 버린 역기능과 부작용의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가 조국 장관 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문제 해결을 위한 소통은 어느덧 사라지고 ‘나만 옳다’는 주의·주장만 소음처럼 난무한다.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말들로 가득 차면서 대화와 타협은 사라진 지 오래다. 마치 수천만 년 동안 문제없이 의사소통을 해왔던 고래들에게 인간의 소음이 잔인하게 침묵을 강요하고 있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우리 시대의 소통 통로인 ‘사회적 저주파’를 가로막는 소음은 과연 무엇일까. 그 진원지는 ‘자신만이 민심을 대표한다’는 독점의 프레임에서 시작한다. 권위주의 정권의 오랜 역사적 경험은 ‘내가 아니면 누가 나라를 지키랴’던가 ‘용기없는 이들을 대신해 분연히 나선다’는 식의 선민의식을 일종의 정치적인 상위 계급으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나의 ‘옳음’을 무기로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몰아붙이며 내 생각을 강요했다. 남을 아예 무시하는 이기적인 자기 확증 편향까지 일상화됐다.

그러나 사회가 분화하고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회 내의 다양한 생각들이 엉키면서 ‘맞고 틀린 게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애국과 민주라는 말은 더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일정한 집단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바뀌었다. ‘깨어있는, 앞에 나선 국민’들은 ‘침묵하고, 지켜보던’ 국민과 맞서게 됐다. 평온했던 동창회마저 민주와 구국 진영으로 나뉠 정도다.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확연하게 쪼개진 민심의 적나라한 모습은 더 이상 그 어느 쪽도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대립구도는 정치적 입장과 상황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보편타당한 사회적 합의와 기준에 대한 혼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검찰 수사를 대표하는 ‘포토라인’이란 말만 해도 그렇다. 어떤 때는 ‘악의 화신’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국민의 심판대로, 어떤 때는 죄 없어 보이는 착한 이들에 대한 무리한 수사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미래예측서 『신호와 소음』의 저자 네이트 실버는 “신호는 진리다. 소음은 우리가 진리에 다가서지 못하게 우리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불통을 소통으로 바꾸기 위해선 소음의 일방적인 송신을 차단하고, 나와 다른 주장과 어울리며 서로 접점을 찾기 위한 긍정적인 신호를 주고받으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너희가 민심을 아느냐.’ 이제 이 원초적인 질문부터 우리 모두가 답해야 할 때다.

홍병기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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