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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보다 M&A로 성장한다, 제네릭 1위 테바의 질주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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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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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체 연구개발(R&D)보다는 스타트업 투자와 인수ㆍ합병(M&A)에 주력하려고 합니다. 기술 트렌드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덩치 큰 기업이 자체 R&D로 셩장엔진을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창업 생태계 속에서 혁신적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장엔진, 펀드와 M&A #테바, 필립스와 벤처캐피털 설립 #스타트업 300개 심사해 16곳 발굴 #AI '두통 예측시스템' 상용화 앞둬 #"정부 투자금 85%, 조건없이 지원"

지난달 24일 텔아비브 북쪽 라아나나에서 만난 이스라엘계 글로벌 제약사 테바의 한 임원의 말이다. 세계적 창업국가 이스라엘의 대표적 비결 중 하나가 넘쳐나는 벤처캐피털과 활발한 투자, M&A 문화다. 아무리 창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더라도 이들을 키워줄 펀드와 이익을 실현해줄 수 있는 M&A 시장이 열리지 않으면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스타트업뿐 아니라 이미 덩치를 키운 대기업으로서도 M&A는 절실하다. M&A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기업의 활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01년 창업, 업력이 120년에 가까운 테바는 연매출 25조원(2017년), 세계 제네릭 의약품 시장 1위를 기록하고 있는 회사다. 그간 제네릭 의약품 시장 공략과 이스라엘의 대표적 기초과학연구소 와이즈만의 연구성과인 신약 특허를 인수하면서 회사를 성장시켜 왔다. 대표적 제품이 만성 신경면역계 질환 중 하나인 다발성 경화증을 치료하는 신약 코팍손이다. 하지만 그 테바도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코팍손의 특허가 최근 만료된 데다 미국 정부가 오바마 정권 이후 계속 제네릭 의약품 가격 인하를 유도하고 있는 때문이다.

이스라엘 쇼암 지역의 테바제약 물류센터 앞에 트럭이 정차돼 있다. 테바는 최근의 경영위기를 자회사를 통한 스타트업 투자와 M&A로 넘어서고 있다. [AP=연합]

이스라엘 쇼암 지역의 테바제약 물류센터 앞에 트럭이 정차돼 있다. 테바는 최근의 경영위기를 자회사를 통한 스타트업 투자와 M&A로 넘어서고 있다. [AP=연합]

이스라엘에서 만난 테바는 이런 성장의 한계를 자회사를 통한 스타트업 투자와 M&A로 뚫고 있었다. 2015년 네덜란드계 전자회사 필립스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벤처캐피털 ‘사나라 벤처스’를 출범시켰다. 사나라는 텔아비브대 등 이스라엘 주요 대학들의 기술지주회사를 통해 혁신 스타트업을 발굴하는 미션을 맡고 있다.

리아트 하다드 사나라벤처스 부사장은 “테바와 필립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스타트업에 우선 투자하지만,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파괴적 수요가 큰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며 “매년 250~300개의 스타트업을 심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현재 16개사를 선별, 육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16개 스타트업은 환자의 재무상태에 맞게 치료계획을 세워주는 ‘테일러메이드’, 인공지능을 통해 두통을 예측해주는 ‘라이프그래프’, 컴퓨터단층촬영(CT) 때 방사선을 90%까지 막아주는 ‘렌즈프리’ 등 의료 관련 분야가 주종을 이뤘다.

하다스 부사장은 “사나라에서 스타트업을 발굴하면 정부가 투자금의 85%를 대준다”며 “스타트업이 성공하면 당연히 갚아야 하지만 실패해도 그만인, 아무런 요구조건이 없는 투자”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최대 펀드사 빈티지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의 올리 글릭 부사장이 한국 코스닥 기업 대표들에게 이스라엘 스타트업과 투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최대 펀드사 빈티지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의 올리 글릭 부사장이 한국 코스닥 기업 대표들에게 이스라엘 스타트업과 투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나라 벤처스가 기존 기업이 운용하는 벤처캐피털이라면 빈티지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는 전형적인 펀드 전문회사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펀드회사인 빈티지는 운용규모가 80억 달러(약 9조5700억원)에 달한다. 모태펀드(FOFㆍFund of Fund) 역할도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후기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내 모든 펀드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창업 생태계의 정점에 서 있는 회사라고 할 수 있다. 빈티지는 1990년대 이스라엘 창업 붐을 일으켰던 정부의 모태펀드, 요즈마가 투자했던 주요 펀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텔아비브 북쪽 헤르츨리아에서 만난 올리 글릭 부사장은 “빈티지는 현재 2000개가 넘는 이스라엘 내 스타트업에 직ㆍ간접적으로 투자하고 있으며, 6500개 기업에 대한 투자정보를 추적하고 있다”며 “360개의 다국적 기업과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통하면 적합한 투자 대상을 발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빈티지 역시 사나라처럼 투자 대상 스타트업을 주로 대학의 기술지주회사를 통해 찾는다. 대학이 혁신창업의 원천이 되고 펀드와 인큐베이터가 스타트업을 키워내는 창업 생태계가 정착된 것이다. 덕분에 이스라엘 주요 9개 대학의 기술지주회사가 로열티로 벌어들이는 돈이 연간 10억 달러(약 1조1900억원)에 달한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창업국가’의 또 다른 파이프라인이다. 사이버보안의 사이버리즌, 블록체인의 코티 등 기술력이 뛰어난 정보기술(IT) 관련 스타트업의 창업자들 중 상당수는 8200부대 등 이스라엘 특수부대 출신이다. 글릭 부사장은 “이스라엘은 대학만큼이나 군대가 에코시스템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엘리트 군인들이 기술ㆍ정보 관련 특수부대에서 쌓은 첨단지식과 리더십으로 창업에 나서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

취재진과 함께 사나라와 빈티지를 찾은 코스닥 기업 최대규 뉴파워프라즈마 회장은 “한국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만들어내는 연구실적은 뛰어난지 몰라도 그런 연구 결과물들이 창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 군대는 말할 것도 없다”며 “인구 900만도 되지 않는 이스라엘에 이런 뛰어난 하이테크 기업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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