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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설, 반말, 엉뚱 질문 컨트롤…토론 사회자 ‘존재의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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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호 27면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농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공격과 수비만 잘하면 된다. 토론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듣기와 말하기만 잘하면 된다. 언제 말을 조리 있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또 언제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이들이 행하는 토론. 상상만 해도 즐겁다. 그러나 그건 이상적인 상황이고, 현실의 토론은 대개 혼란의 도가니다. 그래서 사회자가 필요하다.

말 끊고 일방적인 주장 토론 망쳐 #발언 시간 제한 등 적극적 역할을 #토론장은 자기 성격 발표회 아냐 #침묵으로 싸늘해지는 것도 막아야

사회자라고 다 같은 사회자가 아니다. 게을러터진 사회자는 토론자를 소개한 뒤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간혹 졸기까지 한다. 사회자가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아도 토론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사회자의 무위(無爲) “때문에” 토론이 잘 굴러가는 것인지, 사회자의 무위에도 “불구하고” 잘 굴러가는 것인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사회자가 아무 일 하지 않아도 토론이 잘 굴러가는 것은, 해당 토론자들이 탁월한 토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게 하면 역할 끝?

토론자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게 하고서 자기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회자도 있다. 그 역시 게으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방식은 토론자들에게 고르게 발언 기회가 돌아간다는 장점이 있지만, 토론자들과 관전자들이 토론의 동학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흥미로운 질문이나 화제에 의해 논의가 촉발되어, 풍부한 논쟁과 굴곡과 조정을 거쳐, 간혹 우연의 여신이 주는 축복까지 받아가며, 특정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토론의 백미이다.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기계적으로 돌아가며 한마디씩 던지는 것만으로는 좋은 토론이 되기 어렵다.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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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게으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상식이 무시된 나머지 토론장이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고 있는 상대를 모욕하기 위해, 실내에서 갑자기 선글라스를 꺼내 쓴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제 상대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표시로 소음을 차단하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꺼내 쓰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전혀 귀엽지 않은 중년의 사내가 과도하게 귀여운 표현을 사용하여 상대의 구토감을 유발하는 경우는 또 어떤가. 김영“민”이라는 중년 남성이 자기 자신을 삼인칭으로 불러가며 토론에 임한다고 상상해보라. “민의 궁금증은 여기서 시작한답니다.” “민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소중히 여긴답니다.” “민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말았답니다.” 이런 표현이 거듭되면, 청중은 울부짖으며 광야로 뛰쳐나갈지도 모른다.

누군가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일방적으로 말해서 토론이 망하는 경우도 있다. 말하는 거 자체에 중독된 나머지, 영원토록 말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 때는, 말하기 위한 에너지를 보충할 때일 뿐, 그 외의 시간에는 대체로 말을 하고 있다. 사회자는 이들에게 영겁의 시간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노래를 길게 한다고 좋은 가수가 아니고, 양이 많다고 맛있는 음식이 아니듯, 길게 말한다고 해서 좋은 의견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맛없음을 상쇄하기 위해 양을 많이 주는 식당이 있듯이, 자기 의견의 빈곤함을 감추기 위해 길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사람일수록, 사회자가 개입하면 자기 말을 끊지 말라고 화를 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말 많은 사람은 상대가 호응해주기를 바라며 말을 이어가겠지만, 내키지도 않는데 실없이 동의해주고 싶은 청자는 드물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마음 속으로 말하는 능력인지 모른다. 누군가 어린 시절에 익힌 웅변술을 시전해 가며 상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장광설을 펼칠 때는 그에 맞서 대꾸하기보다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분노를 삭이는 것이다. “어쩌라고?” “토론장 밖에 놓인 과자나 까 잡숴” 등등.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칫 토론에 필수적인 평정심과 예의를 잃을 수도 있다.

토론의 예의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예는, 연장자랍시고 반말을 해대는 것이다. 공적인 토론장에서 반말을 찍찍해대는 사람은 내심 “나 같은 윗사람이 말씀하시니 너 같은 아랫사람은 이 말씀을 잘 받들어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평등을 기치로 내세운 현대사회에서 이런 반말지거리가 그러한 기대효과를 불러올 리는 만무하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어서 원래 상대방의 생각에 귀 기울이기 어려운 법인데, 상대가 반말을 통해 자기 의견을 강요하려 들면, 반발심이 생겨 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면, 연장자는 “어린놈이 어딜”이라는 생각을 할지 모르고, 그 꼴이 고까운 연소자는 “나잇값도 못 하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십상이다. 토론장에서는 상호 존대를 해야 한다.

무례한 경우는 반말지거리뿐만 아니다. 느닷없이 묻는 거다. “아침 먹었어요?” 토론 주제와 상관없는 질문을 받은 상대는 어리둥절하며 일단 반응을 한다. “네, 먹었는데요.” 그때를 놓칠세라 속사포처럼 퍼붓는다. “이따위 형편없는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침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디까!” 이런 물음은 어떤가. “이 책 읽어봤나?” “아뇨, 아직.” “이 책도 아직 안 읽었으면서 숨은 어떻게 쉬고 다니나.”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굴면, 벌떡 일어나 상대를 니킥(knee kick)으로 찍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수 있다. 사회자는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청중들은 토론을 보러 온 것이지 레슬링을 보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코올 많이 든 초콜릿 제공해 토론 유도

이런 상황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자가 토론의 규약을 선제적으로 정해두는 것이다. 특히 상식이 통할 거라고 믿기 어려운 사람이 많을수록 규약을 철저히 해둘 필요가 있다. 상호 존댓말을 쓰자. 한 사람의 발언 시간은 5분 이내로 제한하자. 육두문자를 쓰지 말자. 사회자로부터 발언 기회를 얻어 발언하자. 니킥은 금지한다 등등. 이미 주어진 규약이 있다고 해도 그걸 상대가 반드시 따르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해보라. 뷔페식당에 가서는 음식을 각자 가져다 먹는 것이 규약이다. 누군가 음식을 가져다 주기를 원한다면, 뷔페식당이 아닌 다른 식당을 가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아서, 누군가 뷔페식당의 종업원에게 당당히 반말로 이렇게 요구할지도 모른다. “어이, 종업원 여기 음식 좀 갖다 줘.” “죄송하지만 이곳은 뷔페입니다.” “아, 뷔페인 건 아는데 좀 갖다 달라고. 아 진짜.” 이런 사람이 토론장에 온다면, 사회자의 승인을 얻어 질문을 하기로 규약을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때나 자기 멋대로 질문을 해댈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사회자는 규약을 정해두는 것 이상의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런 난장판의 경우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사회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다름 아닌 토론자들이 지나치게 과묵한 경우이다. 이것은 대학원 세미나 시간에도 종종 발생하는 상황이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강의실에 들어오면 가능한 한 뒷자리에 앉으려는 심리와 비슷하달까.

그러나 토론시간은 자기 성격 발표회가 아니다. 세미나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개인의 심리 문제로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라, 세미나에 자신이 어떤 공헌을 할 것인가의 사안이기도 하다. 생각을 나누고 상대에게 좋은 자극을 주는 것은 해당 모임 구성원으로서의 해야 할 공헌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말을 꺼리는 학생은 여전히 말을 꺼린다. 그리하여 나는 토론시간이 침묵으로 싸늘해지는 것을 막아보고자 한 가지 방책을 생각해냈다. 알코올이 든 초콜릿을 준비했다가 권하는 것이다. 일부 학생들은 토론시간에만 조용할 뿐, 술자리에 가서는 그 누구보다도 수다쟁이가 된다는 제보를 받고서. 오늘도 나는 알코올 함량이 높은 초콜릿을 찾아 상점을 헤맨다. 초콜릿을 퍼먹은 학생들이 좀 더 활발한 토론을 할지 모른다는 가냘픈 소망을 간직하고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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