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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조씨의 증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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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25당시 인민군부 총 참모장이었으며 전후에는 주소북한대사를 역임했던 이상조씨가 한국에 왔다. 그는 한번도 본 일이 없는 누이동생을 비롯하여 사촌동생 등 일가친척을 만나러 추석에 고향을 찾은 것이다.
지금 50대 이상 된 세대들은 53년 여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판문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휴전회담을 반대하여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광복동 거리에서는 하얀 여름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이 연일 억수 같은 장대비를 맞으며 데모를 벌였다.
그 휴전회담의 북한측 수석대표가 바로 이상조씨다. 인민군 중장계급장을 달고 회담장에 나온 그는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대화를 계속할 만큼 차갑고 깐깐한 인물이었다. 오죽 했으면 당시 유엔군 측 대표들이 그를 가리켜 「냉혈한」이라고까지 했겠는가.
그 이상조씨가 한국에 와서 처음 토로한 말이 『6·25는 북한이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엊그제 중앙일보 인터뷰를 보면 그는 54년까지 6·25를 「북침」인줄 알았다고 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심복들에게까지도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며 전쟁준비를 했다.
실제로 여러 기록을 보면 김일성은 48년 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많은 무기를 북한에 넘겨준 직후부터 전쟁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6·25전쟁 계획을 수립하는데 있어 그저 웃어넘길 수만 없는 비화가 있다. 김일성의 이 작전계획은 서울 점령까지 만을 계산하여 작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에게는 일제 때의 빨치산 전투경험이 전부다. 그것은 불의의 기습과 공격만이 유일한 전술로 통했다.
따라서 그는 사단장 정도의 군사지식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6·25전쟁초기 불의의 기습이나 공격으로 얻은 북한군의 전술적 승리 뒤에는 전략적 유치성에서 비롯된 혼란과 패주가 계속된 것을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53년 봄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판문점에서는 군사분계선을 휴전선으로 하자는 의견이분분할 때 김일성은 패색이 짙으면서도 서울을 점령한 후 휴전을 하자고 고집했다. 결국 중국과 소련의 의견에 굴복하고 말았지만.
이 같은 모든 전쟁비사와 함께 북한의 권력투쟁 과정을 증언할 유일한 인물이 이상조씨다. 우리의 얼룩진 현대사를 재정리하는 뜻에서도 그의 증언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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