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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386세대, 압수수색 당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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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너무 오래 끌었다. 조국사태 초기에 결단을 내렸다면 온 국민이 이렇게 시달리진 않았을 터이다. 두 달 쌓인 국민적 피로감은 압축 증기처럼 출로를 찾아 맴돌고 있다. 어느 한쪽이 쓰러져야 끝날 판세다. 국민 다수가 등 돌린 조국 장관이 넉 다운될 확률이 높지만, 이긴 쪽도 안심할 수 없다. 후유증이 워낙 클 터이고, 승자의 전투 방식에 대한 시비가 가을정국을 휘몰아 칠 것이다.

가족도 대학도 범죄의 온상 취급 #‘엄정수사’와 ‘검찰개혁’이 충돌 #조국사태, 386 코어 자숙의 계기 #검찰 아닌 시민사회가 주역돼야

전방위식 압수수색 말이다. 과거 사례에 견주면, 스펙품앗이 논문에 딸이 ‘제 1 저자’로 등재된 것만으로도 조국장관의 사퇴 사유는 충분하다. 관례를 따랐다면 과잉 압수수색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일종의 치킨 게임이다. 나는 모르는 일! 조국장관은 선을 그었다. 그러면 좋다, 샅샅이 뒤진다! 압수수색 50여  곳, 투입된 특수부 검사와 수사요원만 해도 60여 명은 족히 넘는다. 검찰 정예부대가 가족의 행적을 저인망으로 훑었다. 가족사라는 소중한 사적 영역이 공권력에 의해 파헤쳐져 위법성 여부를 심사받는 장면은 ‘사회계약설’의 기본명제를 훼손한다. 수사의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의 과잉’이라는 위기감은 지울 수 없다.

연세대 대학원 사례만 해도 그렇다. 압수수색의 요건은 범죄구성의 상당한 이유와 유력한 근거다. 영장을 발부한 법원도, 전격 출동한 검찰도 확실한 물증과 심증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왜 지루한 공방을 끝낼 일격이 아직 없는가. 검찰이 좀 다급해졌는지 아들에까지 위조 혐의를 확장했다. 전대미문의 ‘가족사기단’이 탄생한 순간, 아니 ‘구성된’ 순간이었다. 공익인권센터 인턴증명서를 제출했다 해서 고지를 점령하지는 않는다 (가짜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일반 대학원 입시에서는 스펙보다 지식수준, 학문적 성실성, 문제의식과 연구주제를 중시한다. 1시간 면접에서 모든 학문 잠재력이 드러난다. 학부보다 대학원입시가 절차관리, 자료보관 등에서 조금 허술한 것은 사실이다. 예정증명서의 발급 과정, 진위여부를 우선 대학 자체조사에 맡겼어야 했다. 시간이 들고 수사 초점이 달라도 신중함을 보이는 것이 수순이다. 누가 어떤 점수를 줬는지에 혐의를 둔 검찰의 수사 논리는 대학의 학문 논리를 압제한다.

연세대 압수수색을 계기로 한국의 명문대, 이른바 스카이 대학이 모조리 범죄 온상이 됐다. 슬픈 장면이다. 조국사태가 여기에 이르렀다. 20세기 파란만장한 한국의 역사를 추동해온 핵심 동력이 교육, 언론, 종교다. 오늘날 언론을 정론(正論)으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크고 작은 분쟁을 유발해 온 종교는 화해와 관용의 횃불을 들지 못한다. 사회적 정의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가 교육이다. 학력 경쟁의 공정성, 그걸 지키지 못했으니 대학은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해야 마땅하다. 그래도 검찰은 지적 성찰을 탁마하는 대학에 기본 예의를 갖춰야 옳았다. 대학을 여느 잡범처럼 취급하는 검찰의 행위가 독재시대 시위주동자를 찾아 강의실까지 진입한 형사의 모습과 겹쳐 자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대통령의 인권침해 우려에 검찰이 즉각 반응하는 것도 일종의 말대꾸처럼 비친다.

시위주동자, 청춘을 바쳐 저항전선에 섰던 그들이 386 코어세대다. 광주항쟁이 남긴 영혼의 상처를 어쩔 수 없어 혁명전사가 됐다. 노동자, 농민, 빈민을 역사무대에 올렸고, 독재, 억압, 불평등이 가동되는 현실과 맞섰다. 70년대 세대가 경찰 곤봉을 맨몸으로 맞았다면, 이들은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었던 행동주의자였다. 대학은 그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랜 안식처였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진 90년대 초반, 경인지역에서만 3천명에 달하는 직업혁명가가 캠퍼스로 돌아왔다. ‘세대 연대’와 ‘세대 정체성’이 어떤 세대보다 뚜렷했던 이들이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한국정치의 중심부에 심었다.

그런 그들에게 강도 높은 불만과 질책이 쏟아진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그들이 확장한 최강 ‘세대 네트워크’로 정치, 경제영역에 독점상태를 구축했다는 얘기다(이철승, 『불평등 세대』). 청춘의 적(敵)이었던 불평등의 장벽을 스스로 쌓았고, 시장과 타협해 아랫 세대를 착취하는 포식자가 됐다는 얘기다. 군림의 기간도 다른 연령대에 비해 길다. 세월에 따른 자연적 세대교체를 고려하면 약간 과장된 주장이라도 신자유주의의 주역이 된 유럽의 68혁명 세대를 생각하면 결코 흘려들을 경고는 아니다. 어차피 권력, 재산, 지위를 거머쥔 그들이 결자해지해야 할 시대적 과제다.

정의와 평등을 새로 세우는 과정은 절박한 현실인식과 사회 운동을 필요로 한다. 아래위 세대단위의 논리가 충돌하면서 사회 주도집단의 깊은 자성과 실천을 끌어낼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서초동 법원거리에서 시민연대와 자유연대가 맞붙었다. 검찰 주도권에 대한 옹호와 항의가 엇갈렸다. 어쨌거나 세대정체성은 검찰의 압수수색 대상은 아니다. 공권력의 과잉개입은 사적 영역의 파괴, 혹은 ‘시민사회의 식민화’를 재촉한다. ‘엄정 수사’와 ‘검찰개혁’이 모순을 빚는 이유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