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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우리 삶은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27일 '사회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주제로 한강(오른쪽)과 진은영의 공동 세미나가 열렸다. 정아람 기자

27일 '사회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주제로 한강(오른쪽)과 진은영의 공동 세미나가 열렸다. 정아람 기자

"애초에 우리는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구분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27일(현지 시각) 스웨덴 예테보리의 스웨덴 박람회장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소설가 한강이 비극적인 역사와 개인의 연관성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예테보리 국제도서전'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이 세미나는 '사회역사적 트라우마'라는 주제로 펼쳐졌다. 한강은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가르기는 쉽지 않다"며 "소년이 온다는 그전까지 내가 썼던 소설과 달리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 큰 이야기 같지만, 나에겐 그게 개인적인 책이다. 또한 채식주의자는 한 개인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적인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광주 출신인 그가 2014년 펴낸 소설 『소년이 온다』는 계엄군에 맞서다 죽음을 맞은 중학생과 주변 인물의 참혹한 운명을 그렸다. 한강은 2009년 일어난 용산참사도 이 소설을 쓴 계기가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2016년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 『채식주의자』는 가부장제에 짓눌려 개인을 잃어가는 한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28일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서 한강(가운데) 작가의 단독 세미나가 진행됐다. [사진 대한출판문화협회]

28일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서 한강(가운데) 작가의 단독 세미나가 진행됐다. [사진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강 작가가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에서 스웨덴 독자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사진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강 작가가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에서 스웨덴 독자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사진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강은 역사적 사건이 개인에게 미치는 상흔에 대해서는 "20세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상처를 남긴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에서는 전쟁과 『소년이 온다』의 근원이 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역사의 비극은 그에게 창작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소설 『흰』에 등장하는 폴란드 바르샤바가 대표적 예다.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고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한강은 "그 소설을 썼던 2014년 8월 말부터 그해 마지막까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으면서 폭격이 있던 자리에 사람들이 사시사철 꽃과 초로 애도하는 장면을 봤다. 하지만 우리는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애도를 해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1980년 5월뿐 아니라 2014년 봄의 비극적 사건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애도할 수 없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문장을 썼다"고 회고했다.

한강은 28일(현지 시각) 열린 단독 세미나에서 소설 『흰』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흰』은 올해 스웨덴어판으로 출간돼 스웨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소설은 강보, 배내옷, 각설탕, 입김, 달, 쌀, 파도, 백지, 백발, 수의 등 65개의 흰 것에 대한 파편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한강은 "그 책은 나의 소설 중 가장 자전적인 소설에 가깝다"며 "나의 내면에 바로 연결된 느낌이 있다"고 소개했다.

28일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에서 한강 작가의 단독 세미나가 열렸다. 정아람 기자

28일 예테보리 국제도서전에서 한강 작가의 단독 세미나가 열렸다. 정아람 기자

여타 소설과는 분류되는 특이한 형식에 대해서는 "나는 처음부터 이 책이 규정되기 어려운 형식의 책이길 바랐다"고 소개했다. 그는 "책이 출간되는 시점에 이르러서 서가의 어느 곳에 꽂혀야 하니까 형식을 정해야 했다. 나는 이 책이 산문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고 에세이기도 하다고 했지만, 편집자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이 책은 소설이라고 붙일 수밖에 없는 형식이 있기 때문에 소설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흰색을 주제로 책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날 오후 공책에다 내가 쓰고 싶은 것들에 대한 목록을 쓰게 됐다. 아이가 태어나면 처음 입는 배내옷과 눈, 별, 달, 그리고 엄마의 젖, 소금과 물에 반짝이는 흰빛, 죽을 때 입는 수의와 소복까지 흰색이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것들과 닿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자신의 근원에 대한 고찰로 귀결됐다. 한강은 "『흰』은 결국 내가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자마자 2시간 만에 죽은 언니에 대한 책"이라며 "엄마에게 언니의 까만 눈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늘 상상했다. 만약 언니가 잘 태어났다면 내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언니의 자리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세미나가 끝날 무렵 한강은『흰』에 실린 '배내옷' 등을 한국어로 낭독했다. "내 어머니가 낳은 첫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여덟 달 만의 조산이라 몸이 아주 작았지만, 눈코입이 또렷하고 예뻤다고 했다. 까만 눈을 뜨고 어머니의 얼굴 쪽을 바라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세미나실을 가득 메운 스웨덴인들은 숨을 참고 한강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예테보리=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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