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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배틀그라운드] "가스불 못쓰는데, 참 맛있네" 143일 순항훈련, 조리병 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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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대한민국 순항훈련전단 문무대왕함이 지난달 28일 진해군항을 출항해 필리핀 마닐라항으로 항행하고 있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2019 대한민국 순항훈련전단 문무대왕함이 지난달 28일 진해군항을 출항해 필리핀 마닐라항으로 항행하고 있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군함을 타고 세계를 일주하려면 준비할 게 많다. 복장부터 다양하다. 4계절 복장이 필요하다. 순항훈련전단(전단)이 출항하던 8월 말은 늦여름이지만 유럽에 들어서는 10월 중순이면 가을로 바뀐다. 캐나다에 도착하는 12월이면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다. 한국으로 향하는 1월 초 태평양을 건널 때는 다시 여름을 만난다.

143일 세계 일주 '시곗바늘' 거꾸로 #해사 생도, 하루 12시간 집중 교육 #맛있는 해군 식단 '1일 4식' 푸짐해 #'망망대해' 선상 음악회·이발·환전도

'슬기로운' 함정생활을 보내야 이처럼 계절을 넘어서는 훈련을 견뎌낼 수 있다. 해군 장병과 사관생도는 지구 한 바퀴 반을 돌며 많은 시간을 함정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143일 훈련 기간에 109일 동안 항행하고 나머지 한 달여 시간은 기항지에서 보낸다.

깔끔하게 정돈된 사관생도 침대. 생도는 3층으로 만들어진 침실 중 하나를 배정받는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깔끔하게 정돈된 사관생도 침대. 생도는 3층으로 만들어진 침실 중 하나를 배정받는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24시간 바다에 떠 있는 함정은 쉴 틈 없이 돌아간다. 그저 항해만 하는 게 아니라 함정에서 사관생도에 대한 수업도 이뤄진다. 기자가 곁에서 지켜본 사관생도는 하루 평균 12시간 수업을 듣고 정기ㆍ수시 시험도 치러야 했다. 기항지에서는 다양한 교류 행사와 군사 외교에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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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 30분. 격납고에 모여든 사관생도는 점호를 받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출항 5일 차인 지난 1일에는 필리핀 마닐라항 입항을 하루 앞두고 홋줄 작업 안전교육도 이뤄졌다. 이어서 시계를 꺼내 시각 변경도 확인했다. 한국과 시간대가 바뀌어서다.

안전 장구를 갖춘 홋줄 요원이 입항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안전 장구를 갖춘 홋줄 요원이 입항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순항훈련에 나서면 시계가 거꾸로 돌아갔다. 이번 훈련은 인도양과 대서양을 지나 다시 태평양으로 돌아오는 항로를 잡았다.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시간권이 늦어진다. 이때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야 한다. 1일 오후 9시에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 8시로 맞췄다. 세계 일주를 모두 마치고 지구를 한 바퀴 돌고 한국에 도착할 때면 꼭 하루가 늦어진다고 한다.

순항훈련 중인 사관생도에겐 이처럼 늘어난 시간이 소중하다. 이들은 하루 평균 12시간 수업과 실습을 받는다. 지난 4년 동안 사관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제 상황에 적용한다. 교육 뒤에는 정기ㆍ수시 시험을 반복하기 때문에 사관생도는 늦은 저녁 시간에도 승조원 식당에 모여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

이른 아침 격납고와 비행 갑판에 모여 체조를 하는 생도와 해군 장병. 박용한 연구위원

이른 아침 격납고와 비행 갑판에 모여 체조를 하는 생도와 해군 장병. 박용한 연구위원

해병대를 지원한 사관생도 7명을 위한 특강도 매일 이뤄졌다. 해병대를 지원한 김호근 4학년 생도는 “어려서부터 국가전략기동군인 해병대를 동경했다”며 “장기간 항해는 힘들지만, 장교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노력하겠다”며 힘주어 말했다. 해사 졸업생 가운데 일부는 지원에 의해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게 돼 있다.

‘선배 장교와의 대화’도 마련됐다. 올해 초 해사 73기로 졸업 후 임관한 주홍재 소위는 마침 문무대왕함 보수관을 맡아 같은 배에 올랐다. 주 소위는 “2년 연속 한국을 장기간 떠나는 순항훈련을 하게 됐다”며 “생도는 장교와 다르기 때문에 마지막 훈련에서 배움을 많이 얻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사관 생도는 순항훈련을 통해 4년 간 배운 이론을 실제 상황에 적용한다. 초급 장교 역량 및 전문성을 키우는 훈련이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사관 생도는 순항훈련을 통해 4년 간 배운 이론을 실제 상황에 적용한다. 초급 장교 역량 및 전문성을 키우는 훈련이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육군ㆍ공군 등 타군을 이해하기 위한 합동성 교육도 포함됐다. 합동작전은 타군과 함께하는 작전이다. 공군사관학교 훈육 요원 남정훈 소령은 공군 작전개념을 해사 생도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소개했다.

해군 장교를 육성하는 순항훈련은 다양한 도움이 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식사를 책임진 조리병의 헌신이 돋보였다. 밤낮 운항하는 함정에서는 야식도 나오기 때문에 하루에 끼니를 네 번이나 챙겨야 한다. 기자가 먹어본 ‘참치 돈가스 토르티야’는 일반식당 음식보다 맛이 한 수 위였다. 아침마다 나오던 빵도 호텔에서 맛보던 수준이었다. “영업비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며 문무대왕함 보급관 윤상 대위는 비법을 묻는 기자 질문에 말을 아꼈다.

이처럼 맛 좋기로 유명한 해군 식단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 직접 조리실로 들어가 직접 해봤다.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대단했다. 자장면 소스를 만들기 위해 고기와 각종 야채를 볶았다. 흔들리는 함정에서 볶음 요리를 위한 ‘삽질’은 매우 어려웠다.

해군 함정에서는 24시간 근무하기 때문에 야식도 제공한다. 야식을 준비하는 조리병.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해군 함정에서는 24시간 근무하기 때문에 야식도 제공한다. 야식을 준비하는 조리병.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함정 조리실은 특별하다. 일반 조리실과 달리 화재 위험 때문에 가스 불을 사용하지 않는다. 전기 코일을 사용해 열기를 전달하는 조리도구로 대신했다. 화력이 약해 덜 타는 장점이 있지만 ‘불맛’을 낼 수는 없다. 조리도구 크기도 작아 한꺼번에 만들 수 있는 음식도 제한된다.

여건은 어렵지만, 음식 맛 하나는 최고다. 이번 순항훈련에 나서면서 문무대왕함 조리팀을 최정예 요원으로 꾸렸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진 한식ㆍ중식ㆍ일식ㆍ양식 등 조리 자격증은 30여 개를 넘어선다. 각종 훈련과 해외파병 경험으로 쌓아온 노련함도 만만치 않다. 문무대왕함 조리장 김경민 중사는 “더 맛있게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장병 건강을 책임진 의료진도 만나봤다. 우선 필리핀 방문을 앞두고 장티푸스 예방 주사를 맞았다. 순항훈련과 원양항해는 풍토병 예방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출항 전 모든 장병은 예방접종을 마쳤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기자는 특별히 처방을 받았다.

순항훈련전단 정성원 군의관이 장티푸스 예방 접종을 준비하고 있다. 의무실에는 각종 의료 장비가 완비돼 있고 전문 의료진이 24시간 항시 응급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순항훈련전단 정성원 군의관이 장티푸스 예방 접종을 준비하고 있다. 의무실에는 각종 의료 장비가 완비돼 있고 전문 의료진이 24시간 항시 응급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훈련을 앞두고 진단장비(X-RAY 초음파 검사ㆍ혈 검사ㆍ소변 검사ㆍ심전도 등)와 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갖췄다. 전단 의무참모인 내과 전문의 정성원 군의관, 응급의학과 전문의 안주호 군의관, 애볼라 긴급구호 파견을 비롯해 8년 차 경력을 갖춘 이가영 간호장교, 해외파병 경험이 있는 문동일 의무장 등은 24시간 의무실에서 대비하고 있다. 각종 훈련 때는 현장에서 장병 건강을 지킨다.

양민수(해군 준장) 순항훈련전단장은 “평소보다 많은 인원과 장비ㆍ부식을 갖췄다”며 “함께 힘을 더해야 성공적으로 훈련을 끝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 전단장은 사관생도에게 “같은 배를 탄 비슷한 또래인 수병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예비 장교로서 앞으로 함께 싸울 전우라는 생각으로 존중과 배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늦은 오후 비행 갑판에 나와 운동을 하는 해군 장병. 갑판 뒤로 이번 훈련전단에 함께 동행하는 화천함이 보인다. 박용한 연구위원

늦은 오후 비행 갑판에 나와 운동을 하는 해군 장병. 갑판 뒤로 이번 훈련전단에 함께 동행하는 화천함이 보인다. 박용한 연구위원

출항한 뒤 시간이 지날수록 파도는 점점 거세게 일렁이었다. 파고가 3m를 넘어서자 서 있기만 해도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벽에 걸어둔 빨래도 심하게 움직였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배가 공중에 올라갔다 떨어지는 듯한 충격도 느껴졌다. 김인호(해군 대령) 전단 참모장은 “이 정도 파도는 자주 만난다”면서 “나중에 대서양에서는 7m 파도를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함정 내부 온도가 올라갔다. 더운 지역으로 들어서면서 피할 수 없는 기온 변화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에어컨 바람도 점점 약하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 문무대왕함 주변을 날며 날치를 찾는 갈매기. 박용한 연구위원

이른 아침 문무대왕함 주변을 날며 날치를 찾는 갈매기. 박용한 연구위원

해군에는 바다 생활의 지혜가 녹아 있다. 좁은 함정에서도 꾸준히 운동한다. 함정 곳곳에는 러닝머신을 설치해 달리기한다. 하지만 파도가 크게 치면 흔들림이 심해 운동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이때는 비행갑판에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린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지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고된 함정 생활의 피로가 절로 풀린다. 아침에 함교에 올라서면 날치를 잡으려 바다로 날아드는 갈매기를 볼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쯤 볼 수 있다는 돌고래도 다가와 인사했다. 날씨가 맑은 때 바라본 바다는 짙은 푸른색이다. 김 참모장은 “이런 바다색이 바로 해군을 상징하는 ‘네이비’ 컬러”라고 말했다.

함정에는 미용사 자격을 갖춘 이발병 3명도 탑승했다. 이들은 이발 뿐 아니라 홋줄 요원과 협수로 견시 임무도 병행한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함정에는 미용사 자격을 갖춘 이발병 3명도 탑승했다. 이들은 이발 뿐 아니라 홋줄 요원과 협수로 견시 임무도 병행한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육지를 떠난 군함이지만 여기서도 작은 마을처럼 대부분 일이 가능했다. 미용사 자격과 각종 대회 수상 경력을 갖춘 이발병 3명도 함께 배를 탔기 때문에 머리카락도 다듬을 수 있다. 이들은 홋줄 요원과 협수로 견시 임무도 병행한다.

기자도 머리를 맡겨봐다. 파도에 흔들리는 상황에서 불안했는데,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함장과 승조원은 물론이고 사관생도 역시 여기서 머리를 다듬었다. 수병은 무료이지만, 간부와 외부인은 2000원을 내야 한다.

일요일에는 기독교ㆍ천주교ㆍ불교 등 종교 행사가 이뤄졌다. 먼 바다 함정에서도 주말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함정 요원과 사관생도들은 입항을 앞두고 매점에서 달러 화폐로 환전도 했다.

기항지 공연 연습을 위한 함상 음악회가 열였다. 김기진 원사가 지휘하는 해군 군악대 캄보밴드가 웅장한 연주를 보여줬다. 박용한 연구위원

기항지 공연 연습을 위한 함상 음악회가 열였다. 김기진 원사가 지휘하는 해군 군악대 캄보밴드가 웅장한 연주를 보여줬다. 박용한 연구위원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함상 음악회도 열렸다. 기항지 공연을 앞두고 최종 연습이다. 군악대는 역대 최대 규모 42명으로 최고 수준 대원을 선발했다. 캄보밴드ㆍ비보이ㆍ성악ㆍ마술공연을 선보이자 함정이 떠나갈 듯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사물놀이 공연 중에는 순간 정적에 빠진 듯 연주에 집중하기도 했다.

출항 6일 차인 지난 2일 드디어 필리핀에 도착했다. 오전 9시쯤 멀리 마닐라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홋줄 요원이 배치되면서 분주한 입항 준비가 시작됐다. 오전 9시 30분에 어느덧 항구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필리핀 마닐라항으로 들어서는 순항훈련전단. 문무대왕함 갑판 요원들이 입항을 준비하고 있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필리핀 마닐라항으로 들어서는 순항훈련전단. 문무대왕함 갑판 요원들이 입항을 준비하고 있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입항 절차는 매우 까다롭다. 자동차 주차하듯 쉽게 들어갈 수가 없다. 현지 도선사의 안내를 받아야 하기때문에 도선사가 문무대왕함에 올랐다. 김태식(해군 대령) 문무대왕함장은 함교(함장이 지휘하는 곳) 안팎을 다니며 매우 신중하게 지휘를 했다.

항구에서는 필리핀 군악대가 환영 연주를 시작했고, 문무대왕함에서도 연주로 답했다. “입항!” 오전 10시 22분 홋줄이 항구에 걸렸다. 현지 교민도 나와 우리 해군을 환영했다. 초등학교ㆍ중학교 학생은 군함에 올라 견학도 했다.

마닐라항에 입한 뒤 현지 교민과 학생은 함정을 견학하고 함정에서 준비한 한식을 맛보았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마닐라항에 입한 뒤 현지 교민과 학생은 함정을 견학하고 함정에서 준비한 한식을 맛보았다. 영상캡처 = 공성룡 기자

환영식에서 한동민 주필리핀 한국대사는 “올해는 한국과 필리핀이 수교한지 70주년”이라며 양국 관계를 강조했다. 양 단장은 “필리핀은 한국전쟁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며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전단 지휘부와 사관생도는 3일 마닐라 6ㆍ25전쟁 참전기념비를 찾아 참배했다.

필리핀에서 예정된 합동공연은 급작스러운 폭우로 취소됐지만, 이튿날 열린 함상 리셉션에서 멋진 공연을 보여줬다. 군수지원함인 화천함에 마련된 방산전시장에선 앞선 한국의 무기체계 기술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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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을 앞두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해군 장병. 문무대왕함 김민규 상병

출항을 앞두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해군 장병. 문무대왕함 김민규 상병

143일 여정에서 불과 6일 동안 같이했던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 바다를 지키는 해군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다. 또한 해군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접했던 경험이다.

바다와 하늘을 구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견시를 서던 수병과 사관생도가 기억에 남는다. 21살 수병은 이번 훈련을 다녀오면 전역하게 된다. 곁에 선 23살 사관생도는 장교 임관을 앞두고 있다. 형과 동생 또는 친구 또래인 두 청년은 눈빛만 겨우 보이는 어둠 속에서 맡은 역할에서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해양강국 대양해군’을 이끌 정예 장교 탄생을 기대하고, ‘2019 대한민국 순항훈련전단’ 안전 항해를 기원한다.

문무대왕함·마닐라 = 박용한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영상 = 공성룡 기자

다른기사 보기 > https://www.joongang.co.kr/Issue/1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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