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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선

“그건 김현종 스타일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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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이름만 대면 알만한 경제학자가 15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우리 경제의 장기침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정책 당국자들이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듯해서 답답하다. 지난해 5월 이후 통계를 선별적으로 이용해서 대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곤 했다.” 과거형으로 쓴 마지막 문장은 하루 뒤 일어날 일을 내다본 족집게 예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8월치 고용통계와 가계동향 조사를 근거로 내세우며 “우리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남북FTA’로 대통령 신임 얻고 #차기 외교장관 후보 0순위 거론 #통상과 외교는 다른 접근법 필요

페이스북을 보다 누군가가 남긴 짧은 댓글, “경제보다 안보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는 문장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온 나라가 ‘조국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상황에서도 나라 살림을 걱정하는 학자가 있고 ‘문제는 안보야’라고 일갈하는 시민이 있었던 것이다.

부쩍 나라 걱정, 안보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위정자들이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시대다. 엊그제 드러난 강경화 외교장관과 김현종 청와대 안보실 2차장의 언쟁은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또 한 줄의 굵은 주름을 팠다. 그 언쟁에서 김현종과 강경화의 역(力)관계, 더 나아가 외교부와 청와대 안보실의 역관계가 분명하게 보인다.

누구나 그렇듯 김현종 차장에게도 장단점이 혼재한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통상전문가이자 협상가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시켜 국민적 스타가 됐다. 업무추진력과 집념은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함께 일해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평가다. 반면 강한 자신감과 집착은 인화(人和)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평가도 따라다닌다.

이런 스타일은 업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과거 한·미 FTA 협상 경험을 토대로 “밀어붙이면 설복시키지 못할 상대는 없다”는 지론을 갖고 있고, 문 대통령도 그 점을 높이 산다고 한다. 협상에서 체득한 노하우와 자신감의 발로일 것이다. 뚝심과 고집이 통상에선 장점이 될 수 있지만, 균형감각과 유연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외교의 세계에서는 단점이 될 수 있다.

그는 지소미아 파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대일 강공 드라이브의 최선봉에 섰다.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우리한테 진짜 영향을 미치는 건 손 한 줌”이라는 등의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정의용 안보실장으로 추정되는 고위 특사의 극비 방일 사실도 공개해 버렸다. 추가 협상 채널을 막는 행위나 다름없다. 노무현 정부가 가장 먼저 추진하던 한·일 FTA 협상에 대해 “제2의 한일 경제병합이 될 것을 우려해 내가 깨버렸다”고도 했다. 그러니 미국이 빠진 뒤 일본 위주로 재편성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가입하자는 논의는 말도 꺼내기 어렵게 됐다. 필자가 접한 증언에 따르면 그는 민간인 신분이던 2016년 지소미아 체결 당시에도 “믿을 수 없는 일본과의 협정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영락없는 ‘뼛속까지 반일(反日)’의 모습이다. 일본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유년 시절 괴롭힘을 당한 개인사와 결부짓는 해석도 있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 있다. 문 대통령은 왜 그토록 김현종을 신임하는 것일까. 그와 친분이 있는 한 증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미 FTA 타결 뒤 청와대 모임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김현종을 크게 칭찬했다. 그러자 김현종이 ‘아직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남북 FTA입니다’라고 답했다.” 실제로 김현종은 2010년 발간한 저서에서 미국과의 FTA 체결을 야구에서 3루까지 진출한 상황에 비유하면서 “홈스틸을 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FTA의 홈스틸은 남북 FTA다”라고 썼다.

김현종의 발언은 당시 비서실장으로 그 자리에 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음이 틀림없다. 그가 노리는 홈스틸은 문 대통령의 지론인 평화경제론과도 겹친다. 바로 이 대목이 인권변호사 출신에 86세대 운동권 참모들에 둘러싸인 대통령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본·미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해외파 김현종의 접점인 셈이다.

숱한 의혹에도 조국 법무장관을 버리지 않았듯 문 대통령은 총선 전 마지막 개각에서 차기 외교장관 혹은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김현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여태껏 겪어 보지 못한 스타일의 외교가 등장할 수 있다. 미우나 고우나 한편인 강 장관에게는 “그게 내 스타일이야(It’s my style)”라 해도 큰 탈이 없지만, 국제 외교 무대에선 상대방의 스타일도 존중해야 한다. 상대방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건 김현종 스타일이고…”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