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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협정' 틀 속에서 진실 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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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관광객들이 마드리드 북서쪽 과다르라마의 전몰자 계곡에 세워진 초대형 십자가를 둘러보고 있다. 높이 152m, 폭 40m로 세계 최대 규모다. 이 십자가는 프랑코 총통이 내전 승리를 기념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과다르라마=유권하 특파원

스페인 내전이 18일로 70주년을 맞았다. 전쟁터에서만 30만 명이 희생됐고 테러.보복.질병.기아로 인한 사망자까지 합하면 얼추 100만 명에 이르는 끔찍한 비극이었다. 내전은 동족상잔을 넘어 당시 국제사회가 안고 있던 각종 이념 대립과 스페인 내부의 모순이 뒤엉켜 폭발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도 불리는 그 역사의 현장을 둘러봤다.

◆ 승자의 유물만 남아=수도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과다르라마 산악지역. 방문객들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자락 위로 우뚝 솟은 거대한 십자가상(산타 크루즈)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높이 152m, 좌우 길이 40m로 세계 최대다. 이 십자가는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1892~1975)이 내전 승리를 기념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탑이다.

탑 밑의 초대형 터널 속에는 천장 높이 22~42m, 앞 뒤 길이가 230m나 되는 세계 최대의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공화파의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등 좌파계열을 무신론자로 몰았다. 그리곤 자신이 일으킨 내전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십자군 전쟁의 이미지를 덧씌우려 했다. 그래서 세운 것이 이 교회다."

안내원 페드로는 설명을 마치고 내전 때 숨진 5만여 명의 영혼이 안장돼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주로 프랑코 휘하에 있던 반군들 유골이다. 프랑코는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 당수 호세 안토니오 리베라와 함께 터널 끝 부분에 묻혀 있다. 맞서 싸웠던 공화국 군인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인정받은 극소수만 여기에 안장됐다. 페드로는 "이 교회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승자와 패자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흉물"이라고 말했다.

◆ 망각협정 덕분에=오늘날 스페인에서 내전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72일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중세풍의 도시 톨레도도 완벽하게 복구됐다. 그러나 신.구 세대간 내전을 보는 시각은 아직도 엇갈린다. "하루는 제 딸이 '어떻게 엄마는 파시스트가 됐느냐'고 물었어요. 내전과 프랑코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고 나서야 나도 옛날 정말 잘못 생각했다는 걸 느꼈지요."내전을 온몸으로 겪은 80대 노인 크리스티나는 그러나 이렇게 덧붙였다."그래도 그 당시 딸이 생각했던 것 만큼 나쁜 사람들은 내 주변엔 없었답니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10년이 지나지 않아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독재시절의 망령은 말끔히 사라졌다. 덕분에 스페인은 주변국으로부터 '민주주의의 기적'이란 찬사를 받았다.

이런 성과는 정치인들이 현실과 타협한 대가였다. 이들은 1975년 프랑코 사후 이른바 '망각협정'으로 불리는 과거사 처리 방안에 합의했다. 내전과 관련된 사람들의 허물을 덮고 절대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법적인 면죄부를 준 것이다.

◆ "그래도 진상은 알아야"=그렇더라도 역사의 진실까지 묻을 수는 없는 법. 내전 발발 70년을 맞아 스페인 사회는 과거사를 재조명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스페인 문화기념사업회는 11월 국제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준비위원장인 훌리아 산토스 교수(마드리드 UNED대)는 "지난 30여 년간 쌓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내전의 원인과 결과, 그 의미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며 "올해는 정치학자.사학자.사회학자뿐 아니라 예술인, 일반 시민들까지 참가해 내전을 새롭게 조망하는 첫 포럼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정부 차원에서도 2004년 9월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가동 중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대체로 내전의 역사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좌파계열 작가인 루이스(28)는 "수치스런 기억"이라고 말했다. 내전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컴퓨터회사에 다니는 오스카(31) 역시 "우파든 좌파든 모두 극한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였다"며 "부끄러운 과거"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그러나 "진상 조사는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마드리드대학 역사학부에서 내전을 연구 중인 김현철씨는 "진상조사위원회에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상당부분 진실은 밝힐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마드리드.톨레도=유권하 특파원

스페인 내전 일지

▶1936년

7월 17일 프란시스코 프랑코(사진) 장군, 식민지 모로코에서 쿠데타

7월 18일 프랑코 군 스페인 본토 상륙, 전국적인 내전으로 확대(내전 공식 개시일)

9월 프랑코 군, 수도 마드리드 포위

10월 프랑코, 자신을 '국가주석'으로 선언하고 군의 대원수로 진급

▶1937년

4월 프랑코, 파시스트 세력 묶어 '스페인 정통파 팔랑헤당' 창당

4월 26일 독일 공군기 북부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폭격. 주민 1654명 사망

5월 스페인 공화군 좌파 진영 내분, 바르셀로나 시가전 발생

▶1938년

2월 프랑코, 내각 구성

▶1939년

2월 공화군의 근거지인 바르셀로나 프랑코 군에 함락. 프랑스.영국, 프랑코 체제 합법 정부로 승인

3월 28일 프랑코 군, 마드리드 접수

4월 1일 프랑코, 종전과 승리 선언. 미국 프랑코 정부 승인

◆ 스페인 내전=프랑코 장군을 핵심으로 한 파시스트 세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가 도화선이 됐다. 이들은 총파업과 유혈폭동의 혼란기를 틈 타 기득권층의 지지를 앞세워 당시 스페인 제2공화국의 좌파계열 정부와 33개월간 전쟁을 벌였다. 스페인 내부의 갈등, 파시즘과 자유주의의 대립이라는 당시 국제정치의 복잡한 요인이 내전의 원인이 됐다. 군부는 공화국 정부가 장군의 수를 줄이는 등 군을 개혁하고 민간정부 통제 아래 두려 하자 강력하게 반발했다. 또 교회.대지주.기업가들은 토지개혁.교권분리 등 좌파정부의 정책들에 반발했다. 갓 태어난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4만여 명의 각국 지식인이 국제여단을 만들어 참전했다. 그러나 프랑코가 이끈 반군은 이탈리아.독일 등 파시스트 국가에서 커다란 군사 지원을 받은 데다 좌파계열 정부가 노선 투쟁과 세력 다툼으로 분열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내전을 소재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화가 피카소는 '게르니카' 등의 명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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