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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극단적 선택 장면 줄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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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 여성이 남편 총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 쓰러진 여성 주변으로 튄 붉은 피가 새하얀 배경과 대비된다. 또 다른 여성은 한강 다리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다. 추락한 여성 위로 다이빙 경기 심사위원이 점수를 평가하는 그래픽이 뜬다.

생명 그 소중함을 위하여 (28) #복지부, TV프로 제작 4원칙 발표 #방법·도구 구체적 묘사 않고 #낭만적·영웅적 미화도 금지

TV 속 자살 관련 묘사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지난해 8월~올 7월 자살 장면이 포함된 드라마 50편을 모니터링한 결과 한 편당 평균 2.4회의 자살 장면이 방영됐다. 지상파와 케이블이 각각 2.4회, 종합편성채널이 2.3회다. 차이가 별로 없다. 이들 드라마의 95.8%는 자살 방법과 도구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약물을 비롯한 다양한 방법을 보여준다. 동반 자살이나 청소년의 극단적 선택을 다뤘고 자살을 미화하거나 희화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백종우 중앙자살예방센터장(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영상은 시청자들에게 직관적으로 다가간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러자 보건복지부·한국방송작가협회 등은 ‘영상콘텐츠 자살 장면 가이드라인’을 지난 5일 발표했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되 극단적 선택을 조장하는 일이 없도록 지침을 제정했다. 지난 4~8월 학계·법조계 외에 현장에서 일하는 방송작가 4명이 논의에 참여했다. 가이드라인 제정 작업에 참여한 조정화 작가는 “처음에는 가이드라인이 꼭 필요한지 의구심이 있었다.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에 자살이 얼마나 자주, 선정적으로 등장하는지 확인하게 됐고 작가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드라마·예능·교양 등 TV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4가지 원칙을 지키도록 권고한다. ▶자살 방법과 도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자살을 문제 해결 수단으로 제시하거나 미화하지 않으며▶동반자살·살해 후 자살 같은 장면을 지양하며▶청소년 자살 장면에는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여기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이 특히 더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아일랜드 등 외국에선 자살 표현을 최대한 줄이라는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채택한 곳이 많다. 캐나다 매니토바주의 가이드라인에는 “자살을 미화하거나 낭만적으로 표현하거나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걸 피해야 한다”고 명시돼있다. 미국 코네티컷주는 “자살을 낭만적이거나 영웅적 행동으로 묘사하는 것, 자살한 사람을 이상적 인물로 표현하는 것은 자살 전염의 위험을 유의미하게 높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넷플릭스 드라마 ‘루머의 루머의 루머’ 중 자살 장면이 나온 뒤 청소년 자살이 증가하자 넷플릭스가 해당 장면을 삭제한 바 있다.

힘겹게 첫발을 뗐지만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화·웹툰 등은 여전히 자살에 대한 표현 제약이 거의 없는 편이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에 복지부도 조심스럽게 자율적인 규제를 고려해보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방송계 자율에 맡기기 때문에 어긴다고 해서 불이익이 따로 없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될지 당분간 지켜봐야 한다. 장영진 복지부 자살예방정책과장은 “언론의 자살 보도 가이드라인도 오랜 기간에 걸쳐 노력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방송작가협회뿐 아니라 연출자, 방송 관계자들에게도 꾸준히 홍보해서 가이드라인을 따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중앙일보·안실련·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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