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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질 음식으로 연 2500만끼 제공···'할머니 푸드 파이터' 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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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을 맞아 차례음식, 선물세트 준비에 분주하다. 그런데 잠깐. 냉장고 속에 묵혀둔 식재료는 없는가. 지난 설에 냉동한 떡이 그대로 묻혀 있진 않나. 환경부에 따르면 한국에서 연간 배출되는 음식물쓰레기 총량은 약 550만t. 8800억 원의 처리비용을 포함해 22조 원 이상의 경제 손실이 발생한다.

2004년 자선단체 '오즈 하베스트' 창립 #남는 식품 기부받아 연 2500만 끼 제공 #'취약계층 돕고 쓰레기 감축' 세계 전파 #"필요 이상 사고 버리는 삶의 방식 바꿔야" # 다큐 '푸드파이터' 음식영화제서 선보여

2004년 호주에서 이벤트 회사를 운영 중이던 로니 칸(67)도 행사 후 무더기로 버려지는 음식물을 보며 ‘이건 아닌데’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먹을 만큼 충분한 식량이 생산되는데 그 중 3분의 1이 버려지고 7억9500만명이 날마다 굶주림에 시달린다.” 칸은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세상 어디서도 멀쩡한 음식이 버려지는 일이 없게 전력을 다하자.”

호주에서 15년째 먹거리 구조 비영리단체 ‘오즈 하베스트’ 운영 중인 사회운동가 로니 칸. 오는 6일 개막하는 제5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 ‘푸드 파이터’가 개막작으로 초청돼 첫 내한한다. [사진 서울국제음식영화제]

호주에서 15년째 먹거리 구조 비영리단체 ‘오즈 하베스트’ 운영 중인 사회운동가 로니 칸. 오는 6일 개막하는 제5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 ‘푸드 파이터’가 개막작으로 초청돼 첫 내한한다. [사진 서울국제음식영화제]

칸은 슈퍼마켓‧음식업체 등에서 남는 음식을 기부받아 굶주리는 이들에게 전달하는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남는 음식’이란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먹는 데 지장 없단 의미다. ‘수확한다’(harvest)는 의미에서 작명한 먹거리 구조단체 ‘오즈 하베스트’는 첫 달 4000인분을 굶주린 이들에게 전달했다. 칸은 자신의 사업을 접고 전업 운동가로 변신했다.

15년이 지난 현재 오즈 하베스트는 호주에서만 기부처 3700곳과 협약을 맺고 자선기관 1300곳을 후원하며 매년 2500만 끼를 제공하고 있다. 매주 50만 인분이다. 뉴질랜드, 영국, 남아공에도 각국 하베스트를 만들어냈으며 푸드 도네이션을 넘어 사회 교육 프로그램도 실시 중이다.

"멀쩡한 음식들이 버려져" 52세 인생 전환

 이 많은 걸 해내는 67세 할머니 운동가가 온다. 오는 6일 개막하는 제5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주한 호주대사관 초청으로 첫 내한한다. 그의 삶과 운동을 그린 다큐 ‘푸드 파이터: 먹거리를 구하라’(감독 댄 골드버그)가 이번 영화제 개막작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 각국의 다양한 음식문화를 소개하며 ‘인생의 맛’을 음미해온 영화제에서 이례적인 선택이다. 그만큼 지속가능한 음식 문화가 우리 삶의 화두가 됐단 얘기다.

내한에 앞서 본지와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칸 대표는 “사람들은 ‘난 음식을 낭비하지 않아’ 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 조부모 세대에선 멍들거나 괴상하게 생겼다고 식재료를 외면하거나 버리진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그러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큐 첫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칸과 자원봉사자들이 대형마트 쓰레기통을 열었을 때 멀쩡한 샌드위치와 포장도 뜯지 않은 채소‧과일 꾸러미가 나온다. 산지에선 약간의 흠집만 있어도 상품성이 없다며 멀쩡한 과일‧작물을 폐기한다. 먹을 수 있는데도 버려지는 먹거리 규모가 호주에서만 연간 400만t, 연 200억 호주달러(약 16조2800억원)에 이른다.

“패스트푸드가 보편화되고 냉장‧냉동 보관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사요. 쇼핑백 다섯 개 중 하나 분량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가죠. 그런데도 호주 인구 2500만명 가운데 200만 명은 식료품 구입비 부족에 시달려요. 그뿐인가요. 매립지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는 환경까지 악화시키죠. 만약 음식물쓰레기가 국가라면 중국‧미국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많은 메탄가스를 배출하는 주범입니다.”

호주 자선단체 '오즈 하베스트'의 창립자 로니 칸이 2017년 태국 방콕의 쓰레기 매립지 현장을 찾아 음식물 낭비를 안타까워하는 모습. 그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푸드 파이터'가 오는 6일 개막하는 제5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된다. [사진 서울국제음식영화제]

호주 자선단체 '오즈 하베스트'의 창립자 로니 칸이 2017년 태국 방콕의 쓰레기 매립지 현장을 찾아 음식물 낭비를 안타까워하는 모습. 그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푸드 파이터'가 오는 6일 개막하는 제5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상영된다. [사진 서울국제음식영화제]

2년 넘게 4대륙을 넘나들며 촬영한 다큐멘터리는 끊임없이 먹거리 문제를 제기하고 협력단체를 늘려가는 할머니 여전사의 모습을 담았다. 영국 찰스 왕세자의 부인 카밀라 파커볼스의 후원을 이끌고 유명 셰프 제이미 올리버와 대규모의 CEO 요리 이벤트를 성공리에 해냈다. 오즈 하베스트가 협력하는 단체‧기업은 동네 슈퍼마켓부터 식당‧카페‧급식업체‧구내식당‧항공사 등을 망라한다.

"바꿀 길은 하나뿐…한 사람씩 바꿀 것"

호주 정부와 협조 속에 2030년까지 음식물 쓰레기를 50% 줄인다는 정책 목표도 세웠다. 음식물 기부를 원활히 하기 위해 2005년엔 관련 법 개정도 이끌어냈다. 남는 식재료를 기부하는 측에서 이로 인한 과실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대신 책임은 온전히 수거하는 측이 지게 된다. 칸 대표는 “엄격한 관리를 통해 아직까지 아무런 위생‧안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도 (우리 파트너인) 콴타스 항공은 남는 요거트를 주지 않고 폐기한다. 이를 설득해 받아내는 게 요즘 과제”라고 말했다.

남아공 출신으로 17세 때 호주로 이주한 칸 대표는 빈곤 국가의 먹거리 문제 해결에 관심이 많다. 오즈 하베스트 시스템을 각국에 전파하기 위해 쉬는 날 없이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열정과 에너지가 놀라울 정도다. 비결을 묻자 “먼저 내가 무엇으로 인해 행복한지 찾고 그걸 위한 일을 늘려가라. 또 주변에 열정적인 사람을 둬라. 열정은 사람을 감화시킨다”고 말했다. 다큐에선 이렇게 고백한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몰랐다. 이 여정이 어디로 나를 이끄는지. 하지만 중독성이 있다. 변화를 만들어내는 걸 확인하니까. 바꿀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고 한 번에 한 사람씩 바꾸면 된다.”

호주에서 연간 발생하는 음식물쓰레기를 시드니항에 투척하는 이미지의 CG로 재구성했다. [Mint Pictures 영상 캡처]

호주에서 연간 발생하는 음식물쓰레기를 시드니항에 투척하는 이미지의 CG로 재구성했다. [Mint Pictures 영상 캡처]

11일까지 엿새 동안 서울남산국악당과 대한극장에서 열리는 서울국제음식영화제에선 각국의 음식과 문화를 그리는 29개국 67편의 영화를 만날 수 있다. 특히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마련한 특별전 ‘영화로 만나는 한국사회와 음식문화’에선 신상옥 감독의 ‘쌀’(1963)과 박철수 감독의 ‘삼공일 삼공이 301, 302’(1995) 같은 작품도 만날 수 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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