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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물건 있습니다” 40초 PT…단속 뜨면 승객인 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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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호 09면

파는 자와 막는 자

‘2분 동안의 정중한 프레젠테이션(PT) 뒤, 그들은 물건을 팔기 시작한다.’

이동상인 어떻게 장사하나 #객차 1칸 2분 안에 장사 끝 ‘속도전’ #출근 순으로 정해진 열차에 투입 #출발~턴 지점 하루 다섯 차례 왕복 #대부분 10시 시작, 오후 4시 칼퇴근 #영업 한계선 있고 마진은 40%선 #저가 업소와 온라인에 밀려 고전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계간 창작과비평(2011년 여름호)에 기고한 ‘1호선의 종결자들’에서 지하철 이동상인의 숨가쁜 나날을 적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16년간 지하철 행상(이동상인)을 관찰해온 달인’이라고 불렀다. 조 교수는 이동상인(상인)의 세일즈 패턴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세일즈 PT의 정석이나 다름없다.

①의례(편안한 여행길에 양해 말씀드립니다) ②희소식 전달(오늘 좋은 물건 있습니다) ③일상의 이슈화(싱크대가 자주 막혀 고생하셨죠) ④기존 해결방식의 한계 비판(약품 쏟아부어도 안 됐죠) ⑤대안의 한계도 쟁점화(사람 부르려니 돈이 얼만가요) ⑥상품의 특수성 강조(이 꼬챙이로 쑤시면 뻥 뚫립니다) ⑦불가사의한 가격 강조하며 마무리(2000원, 특별가로 모십니다).

 지난 19일 서울 지하철의 한 노선에서 이동상인이 '프레젠테이션(PT)'을 하고 있다. 이 상인의 PT는 40초를 넘지 않았다. 김홍준 기자

지난 19일 서울 지하철의 한 노선에서 이동상인이 '프레젠테이션(PT)'을 하고 있다. 이 상인의 PT는 40초를 넘지 않았다. 김홍준 기자

# PT 시간, 40초로 대폭 줄어

지난 19일 3호선 삼송역. 한 상인의 PT가 이어졌다. 40초가 채 안 됐다. 상인은 이후 1분 조금 넘게 객차 안에서 상품을 들고 ‘순회공연’에 나섰다. 모든 과정에 드는 시간은 2분 안팎. 다른 호선의 상인 20여 명도 비슷한 시간을 할애했다. 한 상인은 “이 시간 동안 상품을 판매하는 동시에 장사를 이어갈지 중단할지, 혹은 내릴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가 공개한 서울 1~4호선의 역과 역 사이 운행시간은 평균 1분 40초~2분 20초. 지하철 보안관이 판매 현장을 촬영 또는 녹화하기 전에 나름대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하철 보안관 박상혁(38) 씨가 23일 오후 지하철 5호선 객차 연결 통로문에서 보따리를 짊어지고 물건을 파는 이동상인을 핸드폰 카메라를 이용해 채증하고 있다. 보안관들은 이런 채증 자료를 제시해야 이동상인을 단속할 수 있다. 김현동 기자

지하철 보안관 박상혁(38) 씨가 23일 오후 지하철 5호선 객차 연결 통로문에서 보따리를 짊어지고 물건을 파는 이동상인을 핸드폰 카메라를 이용해 채증하고 있다. 보안관들은 이런 채증 자료를 제시해야 이동상인을 단속할 수 있다. 김현동 기자

지난달 23일 오후, 경의중앙선 능곡역에 파스를 파는 상인이 등장했다. 상인의 표정이 한순간 변하더니 옆 칸으로 이동했다. 경의중앙선에서 활동하는 질서기동반이 탑승한 것이다. 행상은 물건을 노약자석 앞에 놔둔 채 승객 틈에 섞여 앉았다. 질서기동반 1명은 짐을 지키고 다른 1명은 상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면 단속할 수는 없다. 상인은 기동반이 사라지자 상품을 챙긴 뒤 다시 객차를 넘나들며 장사를 했다. 그는 한 차례 더 상품을 팽개치고 좌석에 앉았다가 오후 6시 용산역에서 사라졌다. 그는 “이 시간까지 장사하는 건 이례적”이라며 “직장인들의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 오전 10시에 나와 오후 4시에 칼퇴근한다”고 말했다.

16일 오후 서동탄행 1호선. 돗자리를 파는 상인이 안양역에서 탑승했다. 그는 금정역에서 내린 뒤이어 들어오는 신창행으로 갈아탔다. 이후 성균관대역에서 내려 계단을 이용해 건너편으로 급하게 뛰어 다시 상행선(광운대행)으로 갈아탔다. 그는 “지하철이 번잡하면 장사가 오히려 안되기 때문에 뒤이어 들어오는 열차로 갈아타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하철역마다 출발·도착 시각을 꿰뚫고 있는 것은 기본이다. 박상혁(38) 지하철 보안관은 “이동상인은 출발 지점과 턴(turn) 지점이 일정하다”며 “출발지 근처에는 그들의 사무실이나 창고가 있고, 턴 지점은 다른 구역의 상인들과 합의된 영업 한계선인 동시에 반대 방향 지하철을 이용하기 쉬운 곳”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상인들은 철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상대 승강장’보다 중앙통로 형태의 ‘섬 승강장’을 선호한다. 이들은 하루에 턴을 4~5차례 한다.

1호선에서 만난 한 이동상인의 상품. 요새 같은 초가을에 고추 건조용으로 쓸 수 있는 등산용 돗자리로, 개당 5000원이다. 김홍준 기자

1호선에서 만난 한 이동상인의 상품. 요새 같은 초가을에 고추 건조용으로 쓸 수 있는 등산용 돗자리로, 개당 5000원이다. 김홍준 기자

# 요긴한 물건 vs 믿을 수 없는 물건
팔당역을 지나는 경의중앙선 지하철 안, 상인이 양산으로도 쓸 수 있는 모자우산을 팔고 있었다. 햇볕 쨍쨍한 지난 21일 오후였다. 상인들의 일부 물건은 이처럼 요긴하다는 평이 있다. 초강력 접착 스티커를 활용한 옷걸이, 운전·노동·등산용 전천후 장갑, 꽉 막힌 싱크대 뻥 뚫는 꼬챙이, 특허 출원했다는 파스, 고추 건조용으로 용도 전환 가능한 등산 돗자리, 엘비스·이글스·비지스가 기본 수록된 추억의 팝송 CD 등. 조효제 교수는 이들이 우산·토시 등 ‘예언적 상품’도 판다고 했다. 14일 오후 금정역에서 만난 상인은 퇴근하면서 우산을 챙겼다. 다음날 출근하면서 팔 것인데 실제로 그날 수도권에 16㎜ 가량 비가 내렸다. 토시를 파는 날은 그날 자외선 지수가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제품 상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손님들도 많다. ‘전등에 끼워 넣은 건전지는 방전된 것’ ‘내가 헐크도 아닌데, 우의 벗을 때 단추가 죄다 뜯어져 나갔다’ ‘특허 출원 맞냐’ ‘제품에 적힌 전화번호로 서비스 문의했더니 안 받더라’ 등의 후기와 경험담이 인터넷에 퍼져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상인들은 물건은 어떻게 가져올까. 이른바 ‘독고’로 불리는 상인들은 직접 물건을 떼어온다. 재고가 쌓이면 손해다. 조직에 속한 상인들은 재고 걱정 없이 소규모 유통회사의 물품을 받아 판다. 지하철 보안관들은 “상인들에게는 배정 열차가 따로 있고 출근 순으로 상인들을 1호차, 2호차 등으로 부르며 장사에 투입시킨다”며 “단속에 걸릴 경우 ‘다음 차 한 대 걸러 달라, 나 적발됐다’고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상인들의 마진은 40% 선. 하지만 단속·불경기에다가 다이소 같은 저가상품 판매업소와 온라인 구매의 활성화로 장사가 예전만 못하다. 한 상인은 “장사 잘돼 가게를 차린 사람도 꽤 있었는데, 이젠 이 시장에서도 아이디어 상품이 없으면 안 되는 시대”라고 말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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